조선은 강화도 조약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서양문물을 수입하게 되었다. 1876년 부산이 개항하고 이어 1879년에는 원산이 1880년에는 인천이 개항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강요된 개항이기는 했지만 개항을 통해 새로운 서구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1876년을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1876년 5월 조선정부는 김기수를 정사로 하는 제1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그 전에는 일본에 파견하는 사신을 통신사라고 했지만 두 나라가 동등한 입장에서 사신을 교환한다는 의미로 수신사라고 했다.
5월 22일 부산을 떠나 6월 28일 부산에 다시 도착한 김기수 일행은 일번사찰기라고 할 수 있는 <일동기유>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일본의 각종 풍물들이 실려 있어 조선의 일본정책수림에 결정적인 자료는 될 수 있었지만 김기수라는 인물이 수신사의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적절치 못했기에 실패한 수신사 파견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강요된 개방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조선의 조정에 개방론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강화도 조약의 성립에는 청국의 권유도 있었지만 개방론자인 박규구의 건의도 큰 역할을 했다.
통상개화론은 1860년부터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당시 정계를 주도한 민씨 일족도 청을 통해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인식했기 때문에 개화사상은 제법 폭넓은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개화파로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평양감사와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와 중인 출신의 오경석과 유홍기 등이 있었다.
박규수는 1872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눈을 떴고 1874년 벼술에서 물러 난 후 젊은 관리와 집권층 자제들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전파하는데 전념했다. 박규수의 집에 드나들며 개화사상을 접한 청년 양반 지식인들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홍영식, 서광범, 김윤식 등이었다.
1877년 2월 9일 박규수가 사망한 뒤에는 역관으로 중국을 왕래했던 오경석이 청년 양반 지식인들을 지도했다. 오경석은 네 차례나 베이징을 다녀왔고 박규수와도 친교가 있는 인물이었다.
개화를 위한 의식개혁의 갖당 중요한 수단은 단연 책이었기 때문에 양반계급보다는 역관과 같은 중인 계급이 개화에 더 일찍 눈을 떴다. 오경석은 중인계급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취적인 양반자제들을 개화세력으로 육성하고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