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위정척사운동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10/04 [14:24]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10/04 [14:24]
한국근대사 - 위정척사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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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라가 높아졌다 주로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신봉하는 보수 유생들이었다.

일본과 교류하면 오랑캐문화가 만연되어 우리의 전통이 무너진다는 논리였다.

당시 강화를 거부한 주요인물로는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과 장호근 등이었다. 그는 18761월 한양에 올라가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 엎드려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읽고도 강화를 하려면 먼저 도끼로 내 목을 치라는 뜻이었다.

첫째, 이 강화는 일본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들의 탐욕을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일단 강화를 맺으면 물자를 교역하게 되는데 저들의 상품은 모두 사치품이자 수공업품으로 무한한 것이나 우리의 물화는 모두 필수품이며 땅에서 생산되는 것인즉 우리는 이내 황폐해질 것이다.

셋째, 그들이 비록 왜인이나 사실은 서양 도적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강화가 이루어지면 사교의 서적들이 교역을 타고 끼어들어 온 나라에 퍼지고 윤리가 파괴될 것이다.

넷째, 일본인이 왕래하여 우리의 재산을 탈취하고 부녀자를 능욕하는 등 인간의 도리가 땅에 떨어지고 백성이 안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섯째, 왜적들은 물욕만 높을 뿐 사람 된 도리가 없는 금수와 마찬가지이니 인류가 금수와 더불어 살수는 없는 것이다.

저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한 결론은 지극히 당연했지만 당장 군함과 대포를 들이대고 협박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들의 침략을 막고 강화를 하지 않을 수 있을지 고종과 대신들은 난감했다.

이상론에 근거한 내용을 가지고 상소하는 사람들 속에서 어떨게 난국을 돌파하느냐가 고종의 고민이었지만 결국 고종은 상소에 패륜한 내용이 있다는 구실로 최익현을 전라도의 흑산도로 장호근을 전라도의 녹도로 귀양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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