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운요호 사건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9/23 [13:13]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9/23 [13:13]
한국근대사 - 운요호 사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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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조정은 청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강화 쪽으로 방침을 굳히고 강화도의 연무당에서 조선의 대표인 신헌과 윤지승이 일본의 대표 구로다와 이노우에와 조일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일수호조약 제1조는 조선국은 자주국으로써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되어있고 2개항의 개항 (원산은 1879828, 인천은 1881228일 개항협정 체결), 사절의 파견 및 일본인의 개항장 왕래와 통상허가, 땅의 임차와 가옥 건축, 일본의 조선해안 측량, 영사의 파견과 재판권 등이며 부록에는 개항장 10리 이내의 일본인 자유여행과 일본화폐유통의 허가가 결정되었고 무역규칙에는 아편무역의 금지와 일본 선박의 입항세 면제 및 일본 수입품의 관세면제라는 사상 초유의 무관세조항이 들어 있었다.

강화 조약은 형식상으로는 조선이 최초로 체결한 근대적 조약이다. 형식상으로는 청국의 종주권을 공식적으로 부인해서 양국이 대등한 국가의 자격으로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이 얻은 것은 근대적이라는 이름뿐이었고 실속은 전혀 없었다. 조약의 1조에서 조선의 자주권을 인정한다고 되어있지만 그것은 청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단절시키는 목적이 있었고 일본화폐의 유통권을 확보하여 금융침투의 통로를 마련했으며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를 명시하여 조선이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재정수입을 확대 할 수 있는 수단을 배제했고 개항장에서 행해지는 일본인의 범죄에 대해서 조선의 사법권이 배제되어 일본상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며 각종 군사적 정탐활동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일본이 유럽 열강으로부터 강요당한 것을 역으로 조선에 적용한 것이었다. 조선은 이 조약으로 종주국 행세를 하는 청국과 일본 사이에서 이중으로 압박을 받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에게는 준비된 정한론 실행의 첫 단계였고 조선에게는 준비 없는 근대화의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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