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그대사 - 운요호 사건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9/09 [13:13]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9/09 [13:13]
한국그대사 - 운요호 사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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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해외에 시장이 필요했던 유럽 여러 나라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국의 문호를 두드렸다.

일본은 조선보다 한걸음 앞서 세계정세를 읽고 있었다. 막부정권을 전복하고 천황중심의 절대주의체제를 확립하고 안으로 힘을 모으고 밖으로 그 힘을 뻗어 나가고자 했다.

조선은 밖으로 힘을 뻗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적당한 상품시장이기도 했고 원료공급지이기도 했으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본격적인 정한론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정한파의 주장을 반대하는 무리들도 있어 그들은 내치를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두 파가 충돌한 결과 정한론자들이 패하면서 일본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 급격히 힘을 키워가는 한편 부산을 거점으로 조선에 대한 정보수집에 열을 올리고 군함을 보내 위력을 과l하기도 했다.

그러던 18759월 정체를 알 수 없는 배가 갑자기 강화해협의 초지진 포대에 접근했다. 그 배는 일본의 군함 운양호였다.

초지진 포대에서는 해안을 침범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배에 포격을 가했고 운양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대적인 함포사격을 해왔다. 이어 그 배에서 나온 군사들이 영종도에 상륙하여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고 대포 36문과 화승총 130정을 전리품으로 약탈해갔다.

이듬해 초 일본은 전권사절단을 파견해 강화도 연무당에서 1차 회담을 가졌다. 일본측은 운양호사건을 들어 조선이 일장기를 모독했다고 비난했다.

특명정권대신인 구로다는 운양호가 중국의 우장을 항해하는 도중 우연히 강화도에 진입한 것이라며 운양호에 일장기가 걸려있었음에도 포격을 가한 것은 일본 국기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측 접견대관 신헌은 비록 그 깃발이 일본국가라 하더라도 해상관문을 지키는 군사가 어찌 알고 있었겠는가라고 응수했다.

구로다는 국기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는 한편 조선도 속히 국기를 제정하고 일본과의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만에 정박해있던 일본 함대에서 함포를 쏘게 하여 조선측 접견대관을 공포에 떨게 했다.

조선조정에서는 일본과 강화를 하나냐 마느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청국을 다녀온 이유원이 개항을 권고하는 총리아문대신 이홍장의 긴급서한을 전달했다.

이때의 청국은 영국과 단교 중이었고 서북부 중앙아시아 지역에 원정군의 파병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어서 조선에 분쟁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남하하려는 러시아를 고려할 때 일본과의 조약을 굳이 저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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