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병인양요 (8)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8/12 [13:15]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8/12 [13:15]
한국근대사 - 병인양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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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함대의 내침 사건 이후로 조선의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킨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오페르트라는 독일 상인이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났다. 오페르트는 두 차례에 걸쳐 상해에서 배를 타고 충청도 앞바다에 도착하여 조선의 비방관헌에게 통상의사를 표명하면서 국왕의 알현까지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 일은 프랑스 함대의 1차 원정이 있기 전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68년 오페르트는 병인년 박해를 피해 중국에 와있던 페름 신부의 권유로 680톤인 차이나호를 빌려 타고 4월 18일 약 130명의 인원을 이끌고 충청도 해안인 덕산군 구만포에 도착했다.

 

오페르트 일행은 자신들을 러시아병이라고 사칭하고 덕산군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건물을 파괴했다. 그러다 밤이 되자 어느 한 무덤 앞에 이르러 삽질을 시작했다. 뒤쫓아 간 덕산군수와 아전 등은 혼비백산했다.

 

호령 한마디에 산천초목이 벌벌 떠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남연군의 묘는 바위처럼 견고해 파지질 않았다. 배를 대둔 해안의 조수가 빠져나갈 시간이 되어 초조해진 오페르트 일행은 도굴을 포기하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사태를 전해들은 대원군은 노발대발하며 양이를 추적하여 박멸하라는 엄명을 내리고 천주교도들이 내응을 했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색출과 처단을 명했다.

 

그러는 사이 오페르트는 더욱 기고만장한 행동으로 경기도 영종진 앞마다에 도착하여 현지의 영종첨사를 통해 대원군에게 “속히 고위 관원을 보내 우리와 협상하지 않으면 국난을 당할 것이다.”라는 협박편지를 보냈다.

 

이 글을 받은 정부는 어이가 없어 조용히 글을 되돌려 보냈다. 그 사이 오페르트는 영종도에 상륙하여 총질을 해대며 성문을 쳐들어가려 했지만 수비병들의 반격에 의해 2명의 사망자를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

 

그의 행위가 조선에 미친 영향은 실로 컷다. 조상의 무덤이란 조선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곳인데 이일을 계기로 서양인들은 남의 무덤이나 파헤치는 불법무도한 야만인이라는 생각이 조선인들에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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