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8월 10일 로즈제독은 기함 프리모오케 등 3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산동의 지부항을 출발하여 인천의 작약도 앞바다에 15일에 도착했으나 프리모오게함이 암초에 걸리자 나머지 2척만 이끌고 강화도와 육지 사이를 거슬러 올라 마침내 한강으로 진입해 양천과 양화진을 거쳐 18일 서강에 도착했다. 서울을 관찰한 프랑스군함은 다음날 강을 내려갔다. 순전히 정찰을 위한 1차 원정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조용히 물러가자 백성들은 환호했지만 대원군은 조만간 다시 오리라고 예상했다. 과연 프랑스 함대는 다시 조선에 출현했다. 이번에는 정찰이 아니라 공격이었다.
9월 5일 물류도 앞바다에 7척의 군함이 집결한 프랑스 함대는 한강의 수로가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강화부를 점령하여 한강 하류를 봉쇄하는 작전을 폈다. 한양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막히면 세곡의 운반이 불가능해져 서울의 식량사정이 악화되어 조선정부가 굴복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다음날 프랑스군은 광화도 갑곶진을 점령한 다음 환강하구를 봉쇄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강화부를 공격해 간단히 점령한 다음 통진부도 습격하여 약탈을 한 다음 불을 질렀다.
프랑스군이 강화를 점령하자 대원군은 대경실색하여 기포연해순무사중군인 이용희에게 2천 명의 군사를 주어 출정하게 하자 이용희는 천총 양현수로 하여금 지방에서 모집한 호랑이 사냥꾼 등 약 500명의 병력을 정족산성내에 잠복시키게 했다.
조선인 천주교 신자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로즈제독은 조선군을 얕잡아보고 정족산성안의 전등사를 털기로 하고 10월 3일 프랑스 해병 160명으로 하여금 정족산성 동문쪽으로 올라가게 했다.
그러나 미리 잠복해 있던 양헌수의 병력이 일제 사격을 가해 프랑스군 6명을 현장에서 즉사시키고 30여 명을 부상 입히자 기습을 당한 프랑스군은 깜짝 놀라 도망치고 말았다. 이 싸움으로 인한 조선군의 피해는 1명의 전사자와 3명의 부상자뿐이었다.
로즈제독은 조선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여 강화읍에 불을 지른 다음 그동안 약탈한 서적과 무기, 금, 은을 싣고 조선을 떠났다. 강화부는 약탈당했지만 프랑스군을 물리친 조선군의 사기가 충천했다.
프랑스의 내침사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조선의 태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오랑캐가 강화도까지 침범한 것은 천주교도 때문이고 우리의 강물이 이양선에 더러워진 것 역시 그들 때문이니 그들로써 더러워진 것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양화진 근처에 새로운 처형장을 만들어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그곳에서 목숨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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