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병인양요 (6)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7/15 [16:22]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7/15 [16:22]
한국근대사 - 병인양요 (6)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 주간시흥

                    편집위원장 김용일

대원군의 내치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 했다. 호포제 실시가 그랬고 서원철폐가 그러했다. 사민평등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라의 재정과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감안할 때 그것은 놀랍고도 혁신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대외정책은 달랐다. 이런 비판을 몰고 온 대원군의 대외정책은 쇄국정책으로 그로 인해 벌어진 참상이 천주교도의 박해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원래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1860년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러시아는 이를 중재해줌 대가로 천진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확보했다. 이로 인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가 국경을 접하게 되자 러시아인들이 통상을 요구했고 러시아가 남진한다는 소문도 있어 대원군은 불안해했다. 그러자 이때 승지 남종삼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하자고 건의했다.


이 건의를 대원군은 받아들이려 했으나 지방에 가있던 다불뤼 주교와 연결이 지체되어 차질이 생겼고 설상가상으로 북경을 다녀온 동지사 이홍민이 청국에서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앞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백성들이 천주교도들을 외세의 앞잡이로 오해하고 있던데다 이런 사태가 겹치면서 대원군은 생각을 바꿔 천주교도를 박해하는 쪽으로 방침을 굳혀 서양신부도 서양오랑캐와 한통속이고 조선의 천주교도들은 그들의 앞잡이라고 생각하여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1866년 1월 5일 베르누 주교의 하인 이선이와 전장운, 최형 등이 체포되었고 이어서 다불뤼 주교 등 프랑스 신부 9명과 홍봉주, 남종삼, 정의배등 주요 신자들과 수천 명의 교인들이 체포되어 이들 모두 서울의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 등지에서 순교했다.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의 와중에 리델 신부가 조선을 탈출하는데 성공해 천진으로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내의 천주교도 박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로즈는 북경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에게 즉각 이를 알리자 벨로네는 가까운 시일에 조선을 쳐서 국왕을 갈아치울 것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청국의 총리아문에 보냈다.


이 공문에 경악한 청국의 총리아문사무 공친왕이 조선과 프랑스와의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대원군이 “조선의 국법을 어지럽힌 자들을 다스리는데 프랑스가 무슨 참견이냐?”는 식으로 나오자 로즈제독과 벨로네 대리공사는 “진상조사도 필요 없고 이 기회에 조선을 정복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시대였다. 종교의 사명과 국가의 목적을 혼동할 정도로 천주교를 침략의 도구로 삼고 있던 때로 로즈 사령관과 벨로네 대리공사는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조선의 개항시키려 한 것이다. 구원을 요청한 것은 프랑스 신부였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를 외교와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시흥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