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500년간의 정부시책 중 일반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하여 큰 호응을 받은 반면 부패한 유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사례는 대원군의 서원철폐였다. 원래 서원은 향교와 마찬가지로 선현의 봉사와 학문의 장려를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향교가 국립이었다면 서원은 사립이었다는 것이 달랐다.
서원은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여 학문발전에도 많이 기여해서 많은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받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의 성격이 변질되어 지방 유림의 세력기반이자 당쟁의 소굴로 변해갔고 역을 피하려는 자들이 몰려들었으며 각종 명목으로 백성들을 착취하기까지 해 서원은 어느새 도적의 소굴로 변해버렸다.
서원중 가장 대표적인 표적은 충청도의 화양동 서원과 만동묘였다. 그곳은 대원군이 젊은 시절 유람갔다가 유생의 발길질에 봉변을 당한 곳이기도 할 정도로 유생의 기세가 등등한 곳이었다. 대원군은 나라 안 600여개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조리 허물고 유생들을 쫓아내버렸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유림에 두려워 감히 서원철폐령을 받들지 못하자 격분한 대원군은 한 고을의 원을 파면하고 중징계를 가하자 그제서야 다른 곳에서도 일제히 따랐다.
대원군이 이렇게 과감히 개혁을 단행한 것은 나라 경제에 관한 고려도 없지 않았다. 서원이 불법으로 점유한 땅과 노비를 몰수하고 역을 피한 사람들을 추적해 징수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서원철폐 결과 많은 땅과 노비가 환수되어 국가재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유림의 위세와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이들은 대원군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었다.
대원군은 국가재정 확충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정(田政)을 바로잡아야 했다. 서울의 권문세가와 지방의 토호들은 토지를 많이 점거하고 있는데다 면세, 탈세까지 저질러 국가재정은 날이 갈수록 곤란해져가고 있었고 농민은 농민대로 농사지을 땅이 없어 생활이 곤란했다.
대원군은 먼저 토지대장에 올려지지 않은 땅과 누세결(漏稅結:세금을 내지 않은 농지)을 색출하고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금지하고 사사로이 차지하고 있던 어장을 나라에 환속시켰다. 이어서 군정(軍政)도 상민에게만 부과해오던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확대하여 징수하고 균등과세의 원칙을 적용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각호당 두냥씩 징수했다.
다음으로 말썽 많은 환곡에도 손을 댔다. 본래는 빈민구제책으로 시행되던 환곡제도가 관리들의 고리대로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환곡제를 사창제로 바꾸었다. 인구가 많은 동리에 사창을 설치하여 고을 사람 중에 성실하고 살림이 넉넉한 사람을 정해 관리하도록 했다. 그럼으로 관리의 부정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농민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고 국가재정에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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