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병인양요 (4)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6/10 [15:23]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6/10 [15:23]
한국근대사 - 병인양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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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1863년 12월 27일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그 다음날 33세로 서거했다. 슬하에 궁인 범씨의 소생인 영해옹주가 유일한 혈육으로 후일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했다.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자 영조의 증손인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12세의 소년이 왕위에 등극하니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고종이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아버지인 흥선군과 익종비인 조대비의 협력으로 가능했다.


조대비는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 즉 익종의 비로 일찍 남편을 잃은 그녀는 왕실 내에서는 가장 웃어른이었지만 김씨 가문이 순조대에 이어 철종대에도 외척으로 세도를 부려 조대비는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 조대비는 안동 김씨 가문에 한이 많아 그점에서는 흥선군과 같은 마음이었다.


왕실의 관례상 왕이 후사 없이 사망할 경우 후계자 지명권은 왕실의 최고 어른에게 있었다. 조대비는 그 때를 기다렸고 흥선군도 기다리다 마침내 그때가 왔다.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조대비와 흥선군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안동 김씨들이 왕실의 인물을 다 제거했다고 방심한 탓도 있었다.


조대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종의 대통을 잇게 하여 익성군으로 봉한 뒤 관례를 치르고 국왕에 즉위하게 했다.


고종 즉위 이후 10년간 정권을 잡은 것은 흥선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기 이전 조선의 왕권은 끝없이 추락해있었다. 서학이 전래되어 유교사회의 전통이 동요하고 있는 가운데 세도정치로 인해 왕도정치의 실현은 요원한 채 파행정국이 계속되었다.


국법질서가 문란해지자 전정, 군정, 환곡 등 삼정의 문란으로 국고는 텅 비고 백성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오랜 세월 분노를 삭이며 장안의 파락호로 위장해 살아온 대원군이 무엇보다 먼저 손을 댄 것은 인사행정이었다. 안동 김씨 인맥이 하나씩 밀려나고 당색과 지연, 신분의 차별을 넘어 인재가 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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