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병인양요 (3)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5/27 [16:31]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5/27 [16:31]
한국근대사 - 병인양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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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이같이 비참한데 양반들은 놀고먹으면서 군역이 없었다. 사회가 이렇다보니 양반이 아닌 계층은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양반이 되려고 노력하여 향안에 등록이 되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이사가 유건을 쓰고 양반행세를 하기도 해 양반이 많아지니 노동력이 줄어들고 노동력이 줄어드니 국가생산성이 낮아져 국가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바로 군포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폐단은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양반이든 상놈이등 귀천을 불문하고 고르게 납부하게 함으로 다소 해결이 되었다.


전정, 군정도 문제였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환곡이었다. 조선 말 환곡은 백성을 구휼하기보다는 수탈하는 성격으로 변했다.


본래 환곡은 보유하고 있는 곡식의 반만 나누어주고 반은 새 곡식이 나올 때까지 창고에 보관해야 하는데 수령과 아전들이 불법적으로 다 나누어주어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환곡은 구휼의 목적에서 벗어나 환곡을 받을 때 곡식을 쌓아들 동안에 축이 날것을 계량하여 한 섬에 몇 되씩 덧붙여 받았는데 그 외에 수수료를 붙여 수납하는 것이 관례화되다보니 환곡이 고리대제도로 변질되고 말았다. 고리대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도망을 가면 인징(도망간 병역기피자의 군포를 대신 이웃이 납부하는 일), 족징(도망자의 친척에게 군포를 납부하게 하는 일)이 이루어져 도망자의 부담을 떠안은 백성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한데 백성들이 전국에서 들고 일어나니 나라가 편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나라가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경주에서는 위대한 사상가 최제우가 혜성처럼 나타나 동학을 일으켰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재우에게 혹세무민(세상을 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였다는 뜻) 했다는 죄목을 덮어 씌어 한양으로 압송하던 중 철종의 죽음으로 최제우는 대구 감옥으로 이송되어 이듬해 3월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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