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병오박해 - (3)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4/22 [14:26]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4/22 [14:26]
한국근대사 - 병오박해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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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간시흥    편집위원장 김용일

조선에 입국하여 1845년 11월 한양에 도착 한 후 이듬해인 1846년 5월까지 6개월 정도만 사목활동을 하다 프랑스 신부들의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명을 받고 마포에서 배를 타고 황해도로 떠나 백령도 부근에서 조업 중인 중국인 어선들과 접촉하여 페레올 주교의 편지와 자신의 편지 그리고 조선지도 등을 전달했으나 6월 5일 황해도 순위도의 등산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옹진군으로 끌려와 심문을 받은 뒤 황해도 감사가 있는 해주로 압송되었다.


황해도 감영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받다가 한양의 포도청에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이미 기해박해 때 조선 소년 3명이 외국으로 유학 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선교사 3명을 청해온 사실과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 3인의 소년을 성직자로 양성하기 위해 국외로 보낸 사실을 황사영 백서에서 계획된 것이 실현된 것으로 간주하려했다. 또한 김대건이 중국선박에 전한 서한들은 외국인과 내통했다는 증거가 되었고 더군다나 조선의 연안을 그린 지도는 외세를 불러들이는 음모를 드러내는 확실한 증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재판관들과 대신들은 김대건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폭넓은 서양지식에 놀라 그에게 지리서 편술과 지도의 해독을 지시하기도 했으며 이런 재능은 조정의 인정을 받아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구명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는 동안 김대건과 연관된 1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병오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46년(헌종 12) 프랑스 해군 소장 세실은 1839년 조선에서 행해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 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정도 홍주(지금의 홍성)의 외연도에 들어왔다. 세실은 프랑스 황제의 이름으로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전하고 돌아갔다.


이 국서는 한마디로 조선에 대한 협박 문서였다. 이 문서를 보고 상의하던 헌종과 대신들은 조선인 가운데 저들과 맥락이 상통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신부가 살해된 사유와 연도를 알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국내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하기로 결정하고 프랑스 선박이 출현하여 국내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김대건에 대한 처형이 빨리 이루어져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천주교 신앙은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정계에서 배제된 세력이나 일반 백성들, 여인들에게 지하에서 전파되어 가 1865년에는 천주교도의 수가 2만 3천을 헤아리게 되고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도 12명이나 되는 교세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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