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년 10월 20일 육로를 통해 조선에 잠입하기로 결정하고 요동지방의 백가점에 당도한 김대건은 그해 12월 23일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국경지방으로 떠났다가 북경으로 들어오는 조선사절단 일행에 낀 김 프란치스코라는 교우를 만나 기해박해와 성직자 영입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이 입국하여 메스트로 신부의 영입을 준비하기로 결심한 다음 의주를 통해 조선에 잠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서울로 향하던 중 주민들의 의심을 사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843년 1월 6일 다시 백가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백가점에 은신하던 중 1843년 소팔가자로 옮겨와 신학공부를 계속하다가 1844년 페레올 주교의 명령으로 조선동북부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경원에서 조선교우를 만나 입국절차를 논의했으나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압록강 서북부 국경을 이용하기로 하고 그해 4월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와 신학공부를 다시 해 1844년 12월 27일 드디어 신학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1845년 1월 1일 페레올 주교와 함께 중국 변문에 도착한 감대건은 조선 교우들과 상봉했으나 외국선교사의 입국은 불가능하다고 하여 자신만 조선으로 출발해 한양에 도착하여 현석문이 마련한 집에 은신하면서 교회사정을 파악한 다음 리보아 신부에게 귀국 사실과 함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당 신부 등의 순교 사실을 보고하고 페레올 주교와 성직자들이 내한하여 거주할 집을 충청도 해안 지방에 마련하고자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한양 석관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고 배를 한 척 사서 1845년 4월 30일 11명의 교우들을 데리고 인천 제물포에서 상해로 출발하여 6월 4일 도착했다.
1845년 8월 17일 김대건은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고 8월 24일 만당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고 일주일후에 페레올 주교와 다불뤼 신부를 대동하고 떠났으나 풍랑으로 인해 제주도 해안에 표류하다가 전라도 해안을 따라 금강으로 접어들었다가 10월 12일 충청도 강경 지방에 상륙한 다음 상경하여 용인 지방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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