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병오박해 -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4/01 [16:30]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4/01 [16:30]
한국근대사 - 병오박해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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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시흥         편집위원장 김용일

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시작으로 촉발된 4개월에 걸친 비교적 짧은 기간의 박해사건이었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내포지방 솔뫼(지금의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과 고우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열정적인 천주교인으로 교회에 헌신적이었으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밖에서 참수 당했다.


김대건이 7세가 되던 해 삼남지방에서 벌어진 박해를 피해 조부를 따라 용인군 골배마실(지금의 용인시 내사면 남곡리)에 옮겨와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나이 15세가 되기까지 서당과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독실한 어머니에게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한 대건은 훌륭한 재능과 강한 의지력을 가진 신앙인으로 자라났다.


1836년 초에 내한한 모방 신부로부터 그해 6월 7일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7월 11일 에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교양수업을 받았다. 국내정세로 인해 더 이상 수업이 어려워지자 모방신부는 예비신학생인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신학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마닐라나 싱가폴 또는 페낭에 있는 신학교로 보내기로 결정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1837년 목적지인 마카오에 도착하여 파리외방전교회 지부에 도착하여 신학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지부는 조선인학교를 세워 깔레리 신부가 교장으로 임직하면서 동료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세 명의 조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여 내란상태에 빠지자 조선신학생들은 두 차례에 걸쳐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김대건은 라틴어와 스콜라철학 과정을 마치고 교리학과 조직신학에 본격적으로 매진했다. 하지만 1842년 2월 15일 김대건은 신학공부를 중단하고 조선선교사로 임명된 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조선국왕과 통상을 맺으려는 프랑스 세실제독의 통역관으로 에리곤호에 승선하여 마카오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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