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헌종 2)에는 밀입국한 프랑스 신부 모방에 이어 샤스탕, 앵베르 등이 들어와 비밀리에 선교 사업이 진행되었고 신도수도 크게 늘어나 1만 명을 넘게 되어 민간에 널리 퍼져나가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을 정도였다.
천주교도가 대대적으로 늘어나자 정부에서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조정에서 언론을 맡은 관료와 재야의 유생들이 평소에 원한이 있던 사람들을 천주교를 기화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기로 했다. 겉으로는 천주교 배척을 내새웠지만 실제로는 원수를 갚으려 한 것이었다.
청나라에서 아편밀수 문제로 영국과의 분쟁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서세동점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우의정 이지연이 사학토치령의 주청을 올려 허락받아 1839년 3월에 천주교도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했다.
4월 12일에 권인득 이하 9명을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주와 상주, 안동에서도 10명 내외의 교도를 처형했으며 6월에는 이광열 이하 8명의 목을 베었고 7월에 앵베르, 모방, 샤스탕 등 세 신부는 박해가 계속되는 것을 막고자 스스로 체포되어 8월 14일 참수 당했다. 다음 날에는 이 프랑스 신부를 데려오는데 깊이 관여한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수하여 천주교 수뇌부가 완전히 무너졌다.
조정에서는 10월 18일 박해의 종말을 전국에 통보하고 남은 옥중 교인의 처형을 서둘러 11월 24일 최창흡와 6명의 여자교인이 처형되었다. 조인영은 참형의 절차가 복잡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 절차를 고쳐 옥중의 교인들에게 가능한 한 감옥에서 비밀리에 교수형으로 처리하게 하여 많은 교인들이 교수형을 선택했고 박해를 공공연하게 끝내려는 의도에서 12월 27일과 28일 양일에 박종원, 이문우 등 10명을 마지막으로 사형시킴으로 기해박해는 끝이 났다.
한 해 동안 대략 70여명이 처형되었으며 그중 여자들이 과반수나 차지했다. 정하상의 어머니는 나이가 칠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도 잡혀와 취조를 받았으나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기해박해로 나타난 현상은 이제까지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가 몰락하고 풍양 조씨가 대신하게 되어 조씨의 세도정치는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들어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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