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기해박해 -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3/21 [10:28]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3/21 [10:28]
한국근대사 - 기해박해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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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흥               편집위원장 김용일

 헌종은 1827년(순조 27)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순조의 손자이자 추존된 익종(효명세자)의 아들로 어머니는 풍은 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로 1834년 순조가 죽자 8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 제 24대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할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 김조순의 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헌종이 11세가 되던 해 김조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국구 김조근은 영흥부원군에 봉해져 김조근이 안동 김씨 가문의 중심에 서서 풍양 조씨 세력을 견제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헌종이 14세가 되던 1840년(헌종 6) 12월에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며 헌종에게 국사를 부탁하는 교서를 내렸다.

 

헌종의 재위기간은 1834년에서 1849년까지 15년간으로 이 기간 중 국가의 기본이 되는 전정, 군정, 환곡 등 삼정이 크게 문란했고 역모사건도 일어났으며 서양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여 행패를 부리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이에 헌종은 순조 연간의 천주교 탄압정책을 받아들여 신부를 비롯한 많은 천주교인을 조직적으로 적발하여 학살했는데 이 사건이 이른바 기해박해이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안동 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풍양 조씨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1801년 대박해로 조선에 처음 들어온 성직자 주문모 신부를 잃었고 수많은 순교자가 나온 후 한동안 박해의 기세가 잠잠해지자 이미 순교한 권철신의 조카 권요한을 중심으로 교우들의 활동이 차츰 활기를 띠었다. 이때 정하상은 이 시기의 교회 재건을 위해 크게 노력한 사람이었다.

 

정하상은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가 1801년 순교하자 주위에서 천주교를 버리라고 비난과 학대를 했으나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고 있다가 함경도 무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나서 학덕을 겸비한 교우 조동섭을 찾아가 천주교의 당면한 문제들을 상의하다 성직자를 맞아들이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1816년 10월 동지사 일행의 역관 하인으로 들어가 북경 주교를 만났으나 중국에서도 박해가 일어나 형세가 불리했다.

 

1825년 유진청, 이어진 등과 함께 북경에 가 로마 교황에게 조선교회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 신부를 보내주도록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를 통해 보냈다. 정하상 등이 로마에 보낸 편지는 1827년 전달되어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교회 전교를 맡게 되었다.

 

1831년 프랑스의 외방전교회에서는 중국북경교구에서 조선 교구를 분리시켜 새로 독립된 대리감목구를 창설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 이것은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고 있던 당시의 실정으로 보아 파격적인 조치로 정치외교상의 특례이며 조선을 하나의 독립국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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