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황사영 백서사건(신유박해)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2/22 [12:05]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2/22 [12:05]
한국근대사 - 황사영 백서사건(신유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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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시흥              편집위원장 김용일

 1801년 9월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졌다. 황사영은 본관은 창원이며 자는 덕소로 1790년 정약현과 그의 부인인 이벽의 누이사이에 맏딸인 정난주(세례명:마리아)와 혼인을 하여 이승훈과 사돈간이 되었고 이벽은 외삼촌이 되며 정약종, 정약용은 외숙이 되었다. 혼인 할 당시 정약종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듣고 입교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한빈의 안내로 충북 제천의 베론으로 피신하여 토굴에서 지내면서 외부와의 연락은 김한빈과 황심이 담당하도록 했다.

 

황사영은 토굴에서 지내며 백서를 만들어 북경 천주교 교구 알렉산더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려 백서를 황심에게 맡기고 황심은 옥천희에게 10월 북경으로 떠나는 동지사편의 사절단에 몰래 섞여 편지를 가지고 나가려 했으나 9월 20일 체포되었고 황심은 9월 26일 체포되었다. 황심이 항사영의은신처를 실토하여 황사영, 김한빈, 한계험 등이 의금부에 체포되어 11월 15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황심은 참수되었고 황사영은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 당했다.

 

황사용 백서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조선의 교회를 위해 재정적 지원을 해줄 것과 북경교회와 조선교회가 서로 연락을 할 수 있도록 조선 젊은이를 북경에 파견하고 책문에 연락처를 만들며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요청하여 조선에 서양선교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고 서양의 선박 수백 척과 병력을 빌려 조선에 보낸 뒤 조선 국왕에게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백서의 내용은 당시의 상식으로는 용인될수 없는 일이어서 뮈텔 주교는 불역본 서문에서 “음모의 대부분이 공상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으로 조선정부가 필자에게 엄벌을 가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이런 내용을 접한 조선 조정은 너무나 놀라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더 한층 강화했다.

 

그런가 하면 혹시라도 백서의 사본이 중국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그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신유박해의 전말을 적은 보고서와 함께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요약하여 청나라 예부에 제출하게 하여 그간에 이루어진 박해가 정당했음을 설명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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