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신해박해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2/05 [16:19]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2/05 [16:19]
한국근대사 - 신해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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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시흥            편집위원장 김용일

 18세기 말부터 천주교가 조선사회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여 왕실에서까지 천주교 신자가 나오게 되었고 국왕 정조만이 아니라 영의정인 채제공 등도 이들을 변호하는 입장이었다.

천문, 수학, 지리, 농학, 물리 등의 지식은 서양이 동양보다 월등히 앞서 있어서 정계에서 소외된 남인계열을 중심으로 천주교에 심취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승훈, 이벽, 권철신, 이가환, 정약용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특히 정약용, 이가환은 뛰어난 문장 실력으로 일세에 추종을 받은 사람들로 이들 두 사람이 서학에 심취하게 되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추종하게 되었다.

서학의 확산과 함께 천주교회의 활동도 나타나기 시작해 1785년(정조 9)에는 형조에서 천주교도들을 적발해 처형하여 순교자가 발생했다. 1974년(정조 18) 말에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이 시작되어 1800년에는 교인이 1만 명으로 불어나는 등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자 정치권에서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천주교를 비난하는 상소를 인일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사교는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유교의 진흥에 의해 막을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박해를 가하지 않았다. 이런 배경에는 남인 시파의 영수인 채제공의 영향도 작용했다.

노론들은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참고 기다렸다. 피의 숙청은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천주교를 비판하던 벽파로 바뀌면서 시작되었다.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를 중심으로 벽파는 천주교를 애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인륜을 저버린 종교라 하여 탄압을 가했고 대왕대비는 한술 더 떠 배후인물을 철저히 밝혀 관련자들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천주교도 색출에는 오가작통법이 동원하여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순교자가 발생했다. 이때 대표적인 순교자는 중국인 신부인 주문모와 초기 교회의 지도지인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홍교만, 김건순, 홍낙민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어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천주교회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강진으로 다시 옮겨졌다. 정약용은 강진에 도착하여 두문불출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다가 1808년(순조 8) 봄에 다산으로 이사하여 1천여 권의 장서를 비치하고 저술활동을 시작하다 1818년 9월 15일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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