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실학의 대두 - (5)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01/29 [14:41]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01/29 [14:41]
한국근대사 - 실학의 대두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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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흥               편집위원장 김용일

 

조선의 제23대 왕 순조는 1800년 1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정조가 그해 6월 28일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할 때 순조의 나이가 11살이라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1759년(영조 35)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상소하여 1762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들어 당쟁에서 세자를 옹호하는 시파를 미워하고 세자를 반대하는 벽파를 늘 옹호했다.

벽파와 결탁한 정순왕후는 정치적으로 벽파에 반대하는 천주교 신자가 많은 남인, 시파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박해를 가했다.

1801년(순조 1)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난 해로 신분제 사회가 생긴 이래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온 최하층 신분인 노비 중 일부가 법적으로 해방되었다. 노비는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와 함께 국가나 개인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하던 삼국시대에는 전쟁 포로를 노비로 삼았는데 고려 이후 천년 동안 노비의 자식은 노비가 되는 노비세전법을 만들고 죄를 지은 사람을 노비로 삼았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국가 소유의 공노비와 개인 소유의 사노비로 구분되었고 공노비는 내수사와 각 궁에 소속된 노비를 말하는 내노비와 중앙 관청 소속의 사노비가 있고 그밖의 역에 소속된 역노비, 향교에 소속된 교노비, 지방 각 읍과 감영 등에 소속된 관노비등이 있었다.


본래 공노비는 독자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살림을 하면서 관청에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크게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하느냐 현물을 납부하느냐에 따라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선상노비도 역을 지는 대신 현물을 내는 납공노비로 점차 변해 조선 후기에는 대부분 납공노비였다. 노비가 내는 현물은 남자종인 노예는 해마다 면포 1필과 저화 20장, 여자종인 비는 면포 1필과 저화 10장을 바치도록 되어있었다.

1669년(현종 10) 1월 판부사 송시열은 남자 종인 노가 양인 여자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인 경우 그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양인이 되게 했다가 1675년(숙종 1) 남인이 집권 할 때에는 다시 양인 여자의 소생일지라도 천역에 종사하도록 했다가 1680년(숙종10) 노와 양인여자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일 경우에는 다시 양인이 되도록 했지만 1689년(숙종 15) 양인여자의 소생일지라도 다시 천역에 종사하게 했다.

영조는 1731년 1월 1일 0시를 전후해 태어난 아이를 시작으로 모두 어머니를 따라 양인이 되게 했다. 또한 천한 아내나 첩의 자녀일지라도 다른 노비를 대신 채우면 양인이 되도록 했다.


1774년(영조 50)에 영조는 비가 바치는 면포는 아예 없애버리고 노에게만 1필을 부과 하도록 해 노비의 역이 일반 평민의 역과 동일하게 되어 노비의 신분이 상승하게 되어 양인과 천인의 구별이 거의 사라지게 되어 1801년 1월 28일 내시노비의 혁파를 명해 내시노비 대장이 돈화문 밖에서 소각되어 내시노비는 영원히 양인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이 공노비해방에 집권세력들의 사노비는 전혀 해방하려는 뜻이 없어 우선 국가나 관청 소속의 공노비만 해방시켰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 때 법적으로 공사노비제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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