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은 사(士)의 사회적 책임과 지도력의 책임을 통감하면서 생산 활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나갔으며 호질(虎叱)이나 허생전(許生傳) 같은 소설을 통해 허황된 명분에만 사로잡혀 있는 당시 조선 사대부의 고루함을 통렬히 지적했다.
그는 놀고먹는 존재로 비춰진 당시 사대부들로 하여금 이용후생(백성들이 사용하는 기구 따위를 편리하게 하고 의식을 풍부하게 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생활기술을 습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로 하여금 농, 공, 상업 등 모든 생산 활동을 자도하게 하고 발전을 촉진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역할을 기대한 것이다.
박제가는 13년 간 규장각 검사관 생활과 네 차례의 북경행을 통해 청의 문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개혁의 의지를 심어 나갔다. 서얼 신분이었으므로 그의 개혁사상은 더욱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진일보시켜 농업중심의 가치관을 배격하고 상업중심의 가치관을 수립했다. 상업의 우위는 농업을 중시했던 중세적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자 새로운 근대적 가치관으로의 지향을 의미했다. 그가 지향하는 새로운 가치관은 날로 이(利)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상업을 발달시키려면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주장하는 절검사상을 배격할 필요가 있었다. 절검이라는 것은 있는 재물을 쓰지 않는 것이지 없어서 쓰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을 이용할 줄 모르면 생산할 줄 모르고 생산 없이는 민생은 날로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비는 단순한 소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생산을 자극시키는 것이다.
상업은 생산과 소비의 매개적인 역할을 하기에 더욱 중요했다. 상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교통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교통의 불편으로 같은 물건이라도 지역 간의 가격격차가 큰 것에 유의하여 수레의 적극적 사용을 주장했다. 수레를 사용하게 되면 자연 물가가 평분하게 되고 상업유통이 활발해지며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되어 생산물의 수요가 증대되어 농업과 수공업 모두 발전한다는 논리였다.
그의 이론은 상인과 공인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국정 전반에 걸친 체계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상품규격의 통일, 은의 해외 유출 방지, 소비재의 수입 감소, 국내 상품의 수출 증가로 외화를 획득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동안 묵인되어 왔던 밀무역을 정상적인 무역으로 양성화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와 같은 개혁이론은 근대로 이행하는 18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발전정도와 일부 선진적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공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그의 경제사상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대적 사고방식에 상당히 접근하고 있으며 중세 농업중심사회의 해체를 촉진시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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