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실학의 대두 - (3)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5/12/18 [16:33]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5/12/18 [16:33]
한국근대사 - 실학의 대두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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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시흥             편집위원장 김용일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 경기도 광주(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소내마을)에서 진주목사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와의 사이에 4남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얼마 전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정치적인 와중에 아버지인 장재원은 진주목사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바로 아기가 태어나 그 이름을 귀농이라 지었다.

그가 바로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은 1783년(정조 7)에 생원이 된 후 출세가도를 달려 벼슬이 승지에 이르러 규장각에 들어가 정조의 칭찬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탕론이라는 글에서 민주주의의 선거제도와 비슷한 주장을 펴기도 했고 집단농장의 형태를 제안하기도 했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식이 진보되고 기술이 발달한다는 진보사관을 피력했다.

과학기술에도 일가견을 가져 1789년(정조 13) 한강의 주교 공사를 맡아 마무리했고 1793년에는 수원성 설계를 직접 담당하여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때 그가 고안한 기중기가 사용됐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 가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는데 유배 중에 천하고금의 이치를 연구해 국가가 당면한 민생문제와 경제문제에 대해 그 근원과 결과를 깊이 연구하여 세상에 이로운 학문을 집대성했다.

원각사(지금의 탑골공원) 근처에 박지원의 집이 있었다. 그 북쪽에는 이덕무가 서쪽에는 이서구가 그리고 유득공의 집이 근처에 있었다. 이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서로 모여 청나라를 배우는 것(북학)에 대해 서로의 견해를 주고받았고 청나라에 직접 가서 경험한 것들을 토론하기도 했다.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과 그의 제자벌인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북학론자들은 청나라에 직접 가서 그곳의 선진성과 조선의 후진성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들이었다.

그곳에서는 배울 것이 너무 많았다. 이미 조선에서는 사, 농, 공, 상이라는 것이 겨우 명목만 남은 상태였고 재원은 나날이 곤궁해지는 상태여서 이들은 장차 학문을 한다면 중국을 배우지 않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아무리 오랑캐라 하더라도 떳떳하게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은 청을 배워 이용후생(기물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생활기술을 습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학파라 일컫는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는 모두 북경을 다녀왔다. 이들이 몇 차례 북경행을 통해 느낀 중국은 의식과 문물에서 모두 조선과 비교되었다. 조선도 개혁만 한다면 충분히 중국을 쫓아 갈수 있는데 중국의 문물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 생각했다. 이들 북학론자들은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 청조의 융성한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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