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실학의 대두 -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5/12/04 [15:05]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5/12/04 [15:05]
한국근대사 - 실학의 대두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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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시흥               편집위원장 김용일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경기도 광주부 경내 첨성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성호라는 이름의호수를 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실학자 성호 이익은 이 첨성리에서 평생을 바쳐 학문에 열중하여 불멸의 금자탑을 세웠다.

성호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유학자였고 주자와 퇴계를 존경하는 사람이었지만 형이상학적인 학문에 집착하지 않고 민생의 개선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학문만이 어려운 현실을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이 학자로서의 지론이었다.

성호가 생각한 왕정의 두 기둥은 토지문제와 민생문제였다. 이 두 가지 사안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는 국가도 백성도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개혁을 위한 이익의 의지는 토지제도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7세기 이후 국가의 수탈이 자행되는 가운데 도시의 상업과 고리자금이 침투하여 농촌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농촌경제를 회복하고 민본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이익의 구상은 균전제로 구체화 되었다. 균전제란 균등한 토지소유에 본질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익은 생산노동을 저해하는 요소로 여섯 가지를 들었다. 노비제도, 과거제도, 문벌제도, 기교(세상을 현혹시키는 광대나 무당의 기술이나 솜씨), 중, 유타(빈둥빈둥 놀기만 하고 게으른 사람)가 바로 그것이었다. 노비의 자식이 노비가 되는 당시의 노비제도는 폐지해야할 악법이었고 과거의 문벌은 백성을 수탈하고 무위도식하는 풍조의 기원이고 광대와 무당의 기교, 국역을 피해 곡식만 축내는 중들의 행태도 적지 않은 폐단으로 본 것이다.

성호 이익의 개혁사상은 획기적인 사상으로 당대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그를 따르는 문인들에 의해 조선후기 실학사상이 꽃피우게 된다.

18세기 전반 허후, 이원전,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경기도 광주지방을 중심으로 성립된 성호학파는 성호 이익에 의해 존재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성호 이익은 남인의 학문적 정신적 지주로 수많은 문인과 제자를 양성하여 학문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인정복, 윤동규, 신경준, 정상기, 신후담, 남하행, 황운대, 정항령,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기양,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등이 성호의 학풍을 계승한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학문적 견해 차이로 두 개의노선으로 갈라져 우파는 경학과 역사를 전공으로 하는 안정복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킴으로 국학연구의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좌파인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기양,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등은 중국을 통해 유입된 천주교에 매료되어 서학에 심취한 부류였다.

이 가운데 정약용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되어 18년의 유배생활을 겪기도 했지만 실학의 집대성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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