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1대 왕 영조는 비천한 신분인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출생으로 인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열등감을 교묘히 이용한 노론세력과 사도세자를 비호하는 소론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임으로 해서 노론은 권력은 쟁취했지만 국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는데는 실패했다.
집권 노론 세력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자 권력에서 밀려난 사대부들이 집권층의 자기중심적이고 무사 안일한 태도에 반발하기 시작해 노론의 일당독재에 대항하는 한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현상에 대해 총체적인 비판을 했다. 비판을 했으면 대안을 내놓아야 했기에 내놓은 대안이 실용주의학문이었다.
사대부(士大夫)란 독서를 주로 하는 사(士)와 정치에 종사하는 대부(大夫)의 합성어로 양반과 거의 동의어로 쓸 수 있는 조선시대 지배층의 명칭이었지만 17세기 이후 정쟁의 과정에서 벼슬이 끊어진 사대부는 글만 읽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식을 상품화 할 수 없는 사회에서 벼슬이 끊겨진 그들은 의식주를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여 ‘위로는 왕공을 벗하고 아래로는 농, 공을 다스린다.’는 종래의 인식에서 벗어나 농, 공, 상과 더불어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학정신이었다.
실학사상은 분명 유교적인 전통을 바탕으로 한 근대 지향적이고 민족주체적인 개혁론이었다. 그러나 실학의 형성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다른 요소가 작용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서학과 고증학이었다.
서학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의 통칭으로 조선의 사대부들은 16세기 전반부터 청나라를 통해 서학을 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상식을 넓히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게 되어 남인 지식인을 중심으로 실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청나라의 고증학은 서학과는 달리 비교적 쉽게 수용되어 실증을 매우 중시하는 이 고증학은 황종희, 고염무, 안원 등에 의해 형성된 학풍으로 이익, 이덕무, 정약용, 박제가, 김정의, 이규경 등의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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