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프롤로그 - (1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5/10/30 [15:23]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5/10/30 [15:23]
한국근대사 - 프롤로그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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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자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였다. 학질이라는 병은 여름에 걸리는 전염병인데도 불구하고 2월에 돌아온 세자에게 걸렸다는 점이고 또한 학질에 걸렸다 하더라도 약 처방이 아닌 침술을 시행했다는 점이었다.
당시의 실록의 기록을 보면 “세자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몸이 온통 검은빛이었고 일곱 구멍에서 모두 피가 흘러나왔다.”
이는 독살이 의심스러운 문구로 임금이 짓이 분명하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자가 죽고 난 뒤의 임금의 태도도 충분히 의심을 살만했다. 장례를 전례 없이 사흘 만에 신속히 치르는가 하면 염을 하는 자리에 신하들의 참여를 금지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세자가 죽었으면 당연히 그의 장자가 세자 자리를 물려받을 줄 알았는데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왕위계승자의 지위에 있던 사람이 왕으로 즉위하지 못하면 반드시 종말이 좋지 못했다. 남편을 잃고 자식이 세자의 자격조차 빼앗겨 버린 강빈의 상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강빈과 원손의 존재는 왕에게 큰 골칫거리여서 그는 화의 근원을 미리 제거하고자 했다.
김석과 이경석 등은 그들이 망령되이 행동한 적이 없으므로 강씨들에게 함부로 죄를 줄 수 없다고 했지만 인조는 혼란이 생기기전에 미리 선처하는 것이라는 명목으로 강빈의 형제 4명을 귀양 보냈다.
소현세자의 비극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1646년(인조 24) 1월 3일 인조에게 올린 전복구이에 독약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강빈의 나인과 음식을 만든 나인을 잡아 국문했으나 끝내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강빈이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여 처벌하려 했다.
신하들이 반대를 했지만 세자빈 강씨에게 임금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누명을 씌워 사가로 폐출 시킨 뒤 3월 15일 사약을 내려 죽였으며 강빈의 집안 두 오빠는 곤장을 맞아 사망하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 되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인 자신의 손자들에게까지 연좌죄를 적용하여 제주로 유배를 보내 첫째와 둘째 아들을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여 조국을 발전시키고 백성이 행복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소현세자의 간절한 꿈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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