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프롤로그 - (10)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5/10/23 [15:25]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5/10/23 [15:25]
한국근대사 - 프롤로그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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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 명이 멸망하고 청이 북경으로 천도하게 되자 세자는 순치제의 행렬을 따라 함께 북경으로 들어갔다. 북경 체류 보름이 지난 10월 5일 내관 황종수는 세자에게 신기한 책을 한권 구해 올렸다. 이 책은 ‘숭정역서’라는 책으로 세자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세자의 호기심은 이 책의 번역을 주관한 사람에게까지 발전하여 드디어 마담 샬 이라는 독일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이 신부와의 만남으로 인해 세자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신부는 세자가 북경을 떠나기 전까지 거의 매일 만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서광계의 <농전전서>를 구해 체계적인 영농법을 전해주었으며 양미락의 <천문략>에서는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명리탐>에서는 논리학에 관한 것을 <천학초함>에서는 천주교의 교리와 서양의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해주었다.

가장 경이로웠던 것은 <천학초함>으로 이 서적을 읽고 천주교의 이치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으며 기편에서는 땅을 측량하는 측량술과 농토에 물을 공급하는 수리기술 등을 습득하고 실생활이 이로운 기술이 들어 있는 이 책을 조선에서 출간하여 보급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인질생활 9년 만에 청나라는 소현세자만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청으로서는 이미 친청 세력이 된 소현세자를 더 이상 볼모로 붙들어줄 이유가 없었고 인조의 병세가 심각해 소현세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해야 한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소현세자가 왕위를 잇는 다면 청으로서는 후방의 적이 없어지는 셈이었다.

그러나 본국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세자의 귀국길을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자빈 강씨가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데다 청나라로부터 받은 귀국선물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임금과 조정은 이 같은 세자의 화려한 귀환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봉림대군은 여전히 볼모로 남아 있는데 마치 개선장군처럼 돌아온 세자가 곱게 보였을 리가 없었기에 소현세자는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말았다.

전쟁에 진 굴욕적인 인질생활을 하고 온 세자가 돌아왔으니 반갑게 맞이해야 정상이었지만 인조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런 저런 환영행사도 없이 그저 형식적인 인사치레만 했을 뿐이었고 이러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던 중 소현세자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내의원에서 세자의 병이 학질(말라리아)이라고 해 침을 놓는 시술이 시작되었지만 불과 사흘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아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여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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