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상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출신으로 내무성 회계서기였던 아버지와 상파뉴 출신의 화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한 지 수개월 만에 그는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숙모 슬하에서 자랐다. 훌륭한 음악가였던 그 할머니는 어린 카미유의 음악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2세 반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세 때 벌써 그는 피아노곡을 작곡해 모차르트보다 더 조숙한 신동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정식 음악교육은 7세 때부터 받았고 공식 데뷔는 10세 때 했다.
그때 관객의 앙코르 요청에 답해 그는 이렇게 자신 만만하게 제의 하기까지 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32곡 가운데 어느 것이든 원하시는 곡을 암보로 치겠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면도 있어 86세의 긴 생애를 마치기 불과 수개월 전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이제 겨우 트릴을 멋지게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3세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16세 때 1등상을 탔지만, 라벨처럼 로마대상을 타는 데는 실패했다. 36세 때는 친구인 뷔신과 협력해 국민음악협회를 설립, 포레, 프랑크, 샤브리에, 드뷔시, 뒤카, 라벨 같은 음악가들의 신작을 소개하는 등 쇠퇴일로에 있던 프랑스 음악 부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생상은 13편의 오페라를 비롯해 19세기 음악 장르 전반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양산한 다작가 였으며, 음악 이외에도 문학, 과학등 다방면의 장르를 섭렵했다. 하지만 너무 다재다능한 탓에 오히려 본직인 음악에서는 혁신 적인 기백이 부족 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독자적인 길을 추구 했다기 보다 갖가지 요소를 융합해 형식에 순응하면서 변화를 도모한 음악가라고 볼 수 있다.
음악적 재능을 일찍부터 나타낸 생상은 음악 이외의 여러 방면에도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친구도 많았다. 음악 분야에서는 가수인 포리드 비아르도, 작곡가인 구노, 로시니, 베를리오즈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리스트 또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의 생상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리스트는 특히 생상의 오르간 연주솜씨는 세계 최고라고까지 격찬 했다. 각 방면에 걸쳐 재간과 지식이 워낙 풍부한 생상을 가리켜 베를리오즈는 익살맞게 이렇게 평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다만 무경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부족하다.” 음악 역사상 생상만큼 다재다능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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