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외교정책은 국제적 정세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임진왜란의 참화가 끝난 지 20년도 안된 조선은 명과 후금사이에서 사태를 관망하며 되도록 후금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인조반정이 일어나 명과의 의리를 중요시하는 도덕외교를 구사하자 후금의 조선에 대한 경계심이 팽배해진 가운데 조선에서 후금을 자극하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졌다. 명나라의 요동유격 모문룡이 평안도의 가도에 주둔하면서 조선의 지원을 받아 후금의 배후를 위협했던 것이다. 1627년(인조 5) 후금의 태종은 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했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국왕과 세자는 각기 강화와 전주로 달아나버려 후금군은 조속한 화의를 추진하여 ‘형제의 맹약’을 맺고 철수했다.
1636년(인조14)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군주의 칭호를 황제로 개칭한 뒤 조선에 대해 군신의 관계를 강요했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일전을 불사하자는 척화파와 강화를 주장하는 주화파가 서로 대립하자 인조가 척화론을 지지하여 일전불사하기로 했지만 미처 전쟁 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청병은 압록강을 넘었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도하한 청군의 선봉부대는 불과 6일 만에 서울의 양평리(지금의 불광동 부근)에 진출하여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도로를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갈팡질팡하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12월 15일부터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 장장 45일에 걸친 남한산성 항쟁이 시작되었다.
남한산성은 서울과 가까운 방어의 요충지이긴 했지만 청군의 포위작전에 의한 고립으로 식량과 땔감의 부족으로 결국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리며 신하를 자처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세자와 왕자를 비롯해 60만 명이 넘는 인질을 청국에 보내야만 했다. 청나라에 심양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 일행의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고 자신들과 함께 끌려온 조선 사람들의 참상을 목격했다. 이런 참상을 목격한 소현세자는 자신의 궁핍함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세자빈의 진면목이 나타났다. 청에서 내려준 땅을 경작해 곡식을 거둔 다음 조선에서 진귀한 물품을 들여와 무역을 시작했다. 당시 여성으로써 세자빈이라는 신분으로 이런 무역을 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소현세자 부부는 이 돈으로 많은 조선 사람들을 구출해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문제는 본국과의 관계로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에 이런 저런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하여 명나라와의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군수물자는 물론이고 파병까지 요청한 것이다. 이렇듯 소현세자는 조선 조정에서 해야 할 외교행위를 대신해야만 헸고 이런 행위는 청나라에 또 하나의 조선 조정 즉 왕이 한 사람 더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청에 대한 반감이 더해지면서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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