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프롤로그 - (8)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5/10/08 [13:18]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5/10/08 [13:18]
한국근대사 - 프롤로그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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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정통성으로 인해 고통 받는 중에 1616년 누르하치는 만주를 통일하고 58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라 후금을 세웠다.
그리고 명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뒤 명의 변방을 위협하자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명의 요청을 들어주면 후금의 침공 구실을 주게 되고 파병을 하지 않으면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게 되어 진퇴양난에 빠지자 명의 파병요청에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늦추었지만 결국은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없어 1618년 7월 형조참판 강홍립을 도원수에 평안병사 김경서를 부원수로 임명하여 포수 3천 5백 명, 사수 6천 5백 명 도합 만 명을 지원하면서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렸다.
“우리는 대의명분상 어쩔 수 없이 출병하는 것이고 우리의 힘은 약하니 후금을 적대해서는 안 된다.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
1619년 2월 조*명 연합군 47만과 후금군 6만의 결전이 벌어졌지만 연합군은 대패했고 강홍립의 조선군도 포위당하고 말아 우리의 부득이한 입장을 강조하면서 무조건 항복했다.
얼마 후 누르하치는 조선에 국서를 보내 조선의 출병이 부득이함을 이해해주었고 광해군도 후금과의 우호적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좋은 표현으로 회신을 보냈다.
이러한 처신으로 광해군의 치세 동안에는 명이나 후금 어느 쪽과도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정책도 인조반정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무리들은 오로지 명과의 의리만을 강조하며 배금책으로 돌변하여 후금으로 하여금 2차에 걸친 침략을 당하고 만다.
세자로 책봉되면서부터 끊임없이 정통성 문제로 고통을 받아 왔던 광해군은 선조의 비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정통성을 수호하려 했지만 인조반정으로 축출 당하면서 정통성 수립을 위한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동생을 살해하고 모후를 폐한 반인륜적인 행위를 했으며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교분을 맺었다는 구실로 반정이 일어났다.
조선 제 16대 왕 인조는 선조의 손자인 정원군의 맏아들로 태어나 광해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대북세력의 전횡에 서인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지만 국내외적인 상황은 좋지 못했다.
광해군이 폐출된 후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아 북방경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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