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프롤로그 - (7)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5/10/01 [11:1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5/10/01 [11:17]
한국근대사 - 프롤로그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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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선조 5) 이조전랑 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다. 그런데 이조참의인 심의겸이 이를 거부했다.
이조정랑은 문관의 인사에 있어 정승, 판서를 제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언론 삼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요직을 선발하고 재야인사의 추천권을 가지는 등 여러 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후임을 지명하는 중요한 특권도 가지고 있는 자리인 만큼 이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항상 초미의 관심사였다.

김효원은 심의겸의 저지를 받아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지만 결국 1574년(선조 7) 7월 이조정랑에 당당히 임명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조정랑에 오른 뒤 자신의 후임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오자 공교롭게 심의겸의 아우 충겸이 후임으로 거론되자 김효원은 충겸을 일축하고 이중호의 아들 이발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해 분열은 가시화 되고 말았다.

1575년(선조 8)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분열하여 이 땅에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었다. 김효원이 서울의 동쪽에 있는 건청동(지금의 동대문 시장 터)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계열을 동인이라 했으며 동인들은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로 소장파인사들이었고 서인은 박수를 영수로 하여 이이와 성흔의 제자들이 많았다.
이들이 사사건건 대립하는 가운데 왜군이 쳐들어와 나라가 온통 전쟁에 휩싸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1592년 4월 14일 오후 5시 왜군이 부산에 도착해 파죽지세로 올라오자 다급해진 선조와 대신들은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는 순간 백성들은 원망과 분노가 폭발하여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의 방화와 장례원에 보관되어 있던 노비문서를 소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쟁은 끝이 났지만 전쟁의 끝은 상처와 고통뿐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고 농경지 대부분이 황폐화 되었으며 수많은 귀중한 문화재가 파손되거나 약탈당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당쟁은 끝이 나지 않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대북과 소북은 중북, 탁북, 청북, 골북, 육북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각기 갈라져버리고 말았다.
1592년 왜군이 부산에 침입하자 피난길을 모색하고 있던 다급한 상황에서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와의 둘째 아들로 적자가 아니었기에 정통성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광해군은 왕권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시기인 즉위 초에 정통성으로 인해 심적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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