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효의 윤리를 부정하며 유교에 입각하여 왕권을 제약하던 양반세력 및 양반관료들을 제거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현실에서 연산군은 몽상가이자 비현실주의자로 비쳐졌고 실현하려 했던 절대왕권은 현실적인 양반세력을 넘지 못하고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아 왕위에서 쫓겨난 두 달 뒤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진성대군은 반정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중종이다. 일찍이 태종과 세조는 추대라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사실상 쿠테타의 주역으로 왕위에 오른 반면 중종은 자신이 왕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반정세력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 왕은 유학을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사림파를 주목하다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사림파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조광조의 등용은 중종의 야심작이었다.
조광조 자신도 상당히 불안할 정도로 급속히 승진하자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사회에 대한 소신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지치(至治:매우 잘 다스려지는 정치)가 이루어지는 사회 그것이 바로 조광조가 갈망하던 이상사회였다. 반정세력인 훈구파의 독점에 따른 부작용이 심할수록 조광조의 목소리도 커져갔다.
조광조는 누구보다도 더 백성의 존재를 염두에 두었으니 바로 위민(爲民)이요, 애민(愛民)이었다. 이는 도학정치의 근본으로 도학정치란 도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와 요순시대를 지향하는 정치를 말한다.
이런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현명함이 전제되어야 하고 어진 군주는 신하를 예우 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도학정치를 외치며 이상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조광조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조광조를 주축으로 하는 사림파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려는 훈구파들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처음에는 나름대로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중종이었지만 너무 간섭이 심한 조광조에게 실망한 나머지 훈구파가 마련한 함정인줄 알면서도 조광조를 버리고 만다. 조광조가 정계에서 사라지자 훈구파는 더욱 득세하여 인종이 즉위하던 때까지 득의양양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도 인종조 이후에는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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