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4)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6/11 [12:40]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6/11 [12:40]
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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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 용 일              © 주간시흥

 
3억 냥의 군비배상은 2억 냥으로 감액되고 7년 할부로 연장되었으며 또 권익의 항목도 단지 최혜국 대우라는 표현으로 고치고 (7)항의 조건도 취소하고 담보점령지도 봉천부를 빼고 위해위 만으로 했다. 이와 같은 축소개정이 있은 후 4월17일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비준서의 교환은 5월8일 산동반도의 지부에서 하기로 했는데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본의 요동영유에 제동을 걸자 4월29일 일본은 삼국의 간섭을 받아들여 요동반도를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인 이홍장은 패전의 책임을 져 실각하고 후임으로 운귀 총독인 왕문소가 임명되었다.
 
▲서태후가 황제로 고른 광서제     © 주간시흥

 
1889년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에 이른 오랜 수렴청정 끝에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뜻밖에 황제의 친정을 선포했다. 그리고 자신은 자금성 북쪽에 새로 지은 이화원에 칩거했다.

외형상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이양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상일뿐이고 이미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파의 사람들뿐이었으며 광서제에게는 이화원에 자주 문안인사를 올리면서 서태후에게 모든 국정을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에 여전히 광서제는 허수아비 황제였다.

그러나 명목상이든 허수아비이든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였기에 어엿한 성인이 된 광서제는 자신이 직접 나라를 통치하고 싶어 청일전쟁을 계기로 자신의 좁은 입지를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이 예상외로 강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패배하고 말았고 서태후가 전쟁에 필요한 군비를 빼돌려 이화원을 짓는데 사용하는 바람에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는 세계만방에 청나라의 국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린 꼴이 되고 말아 유럽열강들의 압박은 더욱 심해졌기에 이대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청나라 지식인들 사이에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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