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5/25 [16:30]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5/25 [16:30]
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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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 용 일              © 주간시흥

 
추석 다음날인 9월15일 여순에서는 북양함대가 엄청난 육군병사를 태우고 출발했다. 목적지는 압록강 어귀의 대동구였다. 대동구에 육군을 상륙시켜 수송임무를 완료한 것은 9월17일 이른 아침으로 제독 정여창은 정오에 출발할 것을 명령해 그 준비에 바쁠 때 일본의 연합함대와 마주쳐 청일 주력함대의 해전이 시작되었다.
 
북경함대가 일본함대의 정찰에 걸려든 것이었다. 해전은 5시간에 걸쳐 계속되었고 북양함대는 초용, 치원, 경원 세 군함을 잃고 정원, 진원 두 철갑선은 200여 발의 포탄을 맞고도 침몰되지 않았다. 일본의 기함 송도도 정원 주포의 포탄을 맞고 1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정오부터 시작된 해전은 오후5시가 지나 일본함대가 철수함으로 끝이 났다. 북양함대도 일본함대도 탄약이 바닥났다. 만신창이가 된 북양함대는 대련만으로 돌아왔다.

잇따른 패전에 이홍장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세어지자 청조는 75세의 노장 송경을 기용했다. 송경은 여순에 주둔하고 있는 의군을 이끌고 전선으로 급행하여 전군을 통솔하기로 했다. 의군이 출발한 뒤 11월 일본의 제2군은 요동에 상륙하여 여순을 점령했다.
 
북양함대는 이미 산동반도의 위해위로 이동한 뒤였다. 이때 일본군이 일반 시민과 부녀자를 학살한 사건이 일어나 각국의 신문기자가 이 사건을 전 세계에 보도했다.

여순 함락은 11월21일이고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10월29일에 봉황성에 입성했다. 청국내로 들어가자 일본군은 게릴라화 한 청병과 이에 협력하는 농민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자 전선의 확대로 일본의 국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제1군 사령관 산현유붕은 북경 진격론을 주장해 해성을 함락시켰는데 해성은 봉천과 가까운 곳에 있고 산해관으로 가는 길도 열려있어 이곳은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지로 봉천은 청조가 산해관을 넘기 전의 두 황제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의 능이 있어 청국에게는 특별한 뜻을 지니는 지역이어서 노장 송경이 이끄는 의군은 해성에 대한 공격을 되풀이했다.
 
해성의 전방에 있는 항와채를 일본군이 일단 점령했지만 송경의 맹 반격으로 4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그리고 해성은 다섯 번이나 공격을 받아 고전하고 있었다. 청국은 강화를 위해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으나 일본은 시기가 무르익어 가고는 있지만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강화가 타결될 때까지 휴전할 의사가 없었다.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관 이동우형 중장이 영국군함 셔먼호에 부탁하여 위해위의 정여창에게 1월23일 항복권고문을 보냈으나 정여창은 거부했다.

1월30일 위해위의 남방포대가 함락되고 다음날 북 포대의 수비병이 포대를 비우고 도망가자 북양함대는 부득이 아군의 탄약고와 포대를 포격했다. 2월4일 야간전투에서 청국은 북양함대의 상징인 정원을 잃었고 다음날 야간전투에서 내원과 위원 두 군함을 잃었다. 정여창은 정원을 잃고 난 뒤 2월12일 유공도에 상륙하여 음독자살 했다.

이리하여 위해위는 함락되고 북양함대는 일본 측에 인도되었으며 북양함대가 궤멸한 다음날 청국 조정은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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