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5/18 [17:09]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5/18 [17:09]
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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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 용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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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에 있는 조선주재 청국 총리 공서도 일본군의 공격을 받자 원세개는 전날 밤에 도망해 귀국한 후였고 그 뒤를 맡고 있던 당소의는 영국 총영사관으로 피신했다.

7월24일 조선국왕이 생부인 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조서를 내리자 대원군은 민씨 일문에 대한 숙청은 신속하게 단행했지만 대조공사가 요구한 공문 `조선정부를 대신하여 아산의 청군을 격퇴해 주시오`은 잘 내주려 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아산을 향해 출발하고 나서야 간신히 공문을 얻었다. 이홍장의 작전은 병력을 평양에 집결시키는데 있어서 아산에 있는 제독 섭지초가 이끄는 2천명의 청군을 해로를 통해 평양으로 옮기려하자 섭지초가 이를 거부하고 평양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아산에도 증원군을 보내 남북에서 협공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계획이 변경되어 아산에 증원군을 보내게 되어 영국회사로부터 전세 낸 애인호와 비경호는 약1천3백 명의 증원군을 무사히 상륙시켰고 뒤이어 고승호로 1천명의 증원군이 도착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증원군을 호위하기 위해 순양함 제원과 포함 광을이 내항해 있었다.

일본해군 제1유격대의 선발인 3척의 군함은 7월24일에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발견했지만 일본이 청국에 보낸 최후통첩의 마지막 날이어서 공격을 삼가고 있다가 다음날인 25일 일본군함이 갑자기 포문을 열자 제원과 광을은 당황하여 백기를 내걸고 포격을 하면서 도망가 대파되고도 여순까지 도망갔으며 광을은 해안에 좌초하여 화약고가 폭발했다.

여기에 약1천 명의 증원군을 태운 고승호가 포함 안조강의 호위를 받으며 당도하자 일단은 영국선박이었으므로 임검한 다음 격침시키고 백인 선원만 구조했다.

섭지초는 약3천5백 명의 병력을 양분해 성환에 2천명을 배치하고 공주에 1천5백 명을 주둔 시켰는데 일본의 양동작전에 걸려 성환에서 참패했다. 그런데도 섭지초는 승리라고 보고하고 이제부터 평양의 우군과 합류하겠다고 했다. 청국의 패잔부대는 산을 넘고 들을 건너 비참한 모습으로 북쪽을 향해 도망갔다.

평양에 있는 여러 장군들 사이가 화목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은 이홍장은 통솔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섭지초에게 그 임무를 맡겼는데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이 북상해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총알이 거의 바닥나 야진 중장은 일단 포위를 풀고 재기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때에 평양성 꼭대기에 백기가 내 걸렸다. 백기를 내건 뒤 청군은 앞 다투어 도망갔다. 청군 전사자는 2천명 일본군 전사자는 180명으로 청군의 대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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