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사후처리로 일본은 외무대신 정상형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조선에 보내 조선의 사죄, 배상금 지불, 일본인 살해범의 처형, 소실된 공사관을 신축할 대지의 제공 등을 약속한 `한성조약`에 조인했다.
또 이듬해 이등박문이 중국으로 건너가 이홍장과의 사이에 `천진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은 양국 주둔군의 철수를 약속하고 장차 한쪽에서 출병할 때는 사전에 통고하기로 결정하고 또 조선군의 훈련은 청일 양국이외의 외국인 교관에게 위촉한다고 정해 미국장교를 초빙하기로 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일본은 조선에 친일정권을 수립하려는 쿠테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일본이 쿠테타에 실패한 채 그대로 물러난 것은 일본의 전력이 청국에 비해 떨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양국의 전력을 비교해볼 때 일본은 특히 해군의 세력이 약했다.
청국의 북양함대는 정원, 전진이라는 그 당시 초대형의 철갑선이 있어서 일본으로서는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갑신정변 후 일본은 청국을 가상적국으로 삼아 군비증강에 힘써 군비를 착착 증강해가고 있는 것에 반해 청국은 그렇지 못해서 서태후의 회갑축하연에 임박해 그녀를 위해 이화원에 만수산의 대 정원을 축조하기로 하여 북양함대의 증강에 쓰일 비용이 그쪽으로 사용되었다.
청국은 10년 동안 단 한척의 군함도 발주하지 않은 반면 일본이 발주한 군함은 신형으로 속력이 빠르고 장비도 새로운 것이었다. 전력 면에서 청국을 능가한다는 자신이 생기자 일본은 오직 전쟁을 벌일 기회만 노렸다.
김옥균이 암살당한 것이 1894년3월로 거의 같은 시기에 동학란이 일어났다. 동학군은 백산에 수만 명의 무리를 모으고 황토현에서 토벌 나온 정부군을 격퇴하자 조선조정은 크게 놀라 홍계훈을 사령관으로 임명해 다시 토벌군을 보냈다.
그런데 홍계훈이 남쪽으로 유인되어 나간 사이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전주는 이씨조선 시조의 출생지여서 마침내 일의 중대성에 놀란 정부는 종주국인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조선의 민씨 일문이 두려워한 것은 동학이 대원군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은 이미 천진에서 송환되어 와있어서 민씨 일문에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민씨 일문은 청국에 의지해서라도 동학란을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다.
이홍장은 6월4일 출동명령을 내렸다. 전쟁을 벌일 기회만 노리던 일본은 청국의 출병통지가 있기 이틀 전에 출발해 6월9일 인천에 도착즉시 비를 무릅쓰고 한성으로 들어왔다. 거리가 가까운 청군은 6월8일 아산만에 도착했으나 후속선박을 기다려 12일에야 겨우 아산에 집결할 수 있었다. 일본군이 한성에 나타나자 조선정부는 경악했다. 파병을 요청한 청군보다 먼저 일본군이 수도로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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