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불전쟁의 여파는 동쪽에도 미쳐서 청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다른 것을 돌볼 여유가 없다고 본 일본은 조선에서 쿠테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것이 갑신정변으로 1884년 12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씨조선 25대 왕인 철종에게 아들이 없어 방계에서 이희가 추대되어 1863년 즉위했는데 그에게는 친아버지가 있어 대원군이라 불리었다.
임오군란은 개화 주의적 입장을 취한 민씨파가 일본에서 장교를 초빙해 조선군에게 훈련을 시켜 군대의 근대화를 도모한데서 비롯되었는데 신식군대가 생기면 구식군대는 해산되고 거기에 속한 군인들은 직업을 잃게 되는 불안감이 있는데다가 그들에 대한 봉급이 늦어졌고 그나마 늦게 배급된 쌀에 모래가 섞여있어서 구식군대의 불만은 폭발하고 말았다.
이 불만의 화살은 당연히 신식군대를 조직한 민씨파로 향했고 불평에 차있던 대원군이 군대의 불만에 편승하듯 하여 벌인 것이 임오군란으로 민씨 정권에 대한 반항이자 동시에 반일 폭동이기도 하여 일본공사관을 불 지르고 일본인을 살해했다.
화방공사는 황급히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군함을 타고 다시 조선에 돌아와 무력을 앞세워 조선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임오군란에 대한 청국의 견해는 분쟁의 원인이 대원군에 있다고 생각하고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 조선의 정치에서 격리시켰다.
청국은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3천의 군대를 보내고 참모로 종군했던 24세의 원세개가 조선에 남아 조선의 사대화 공작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에 청불전쟁이 벌어졌으므로 일본은 이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친청정권인 민씨파를 타도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파 정객들은 죽첨공사의 지원을 받아 1884년 12월4일 거사했다. 이날은 한성의 우정국이 낙성된 날로 축하연을 벌이고 있을 때 쿠테타파는 우정국 근처에 불을 질러 연회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창덕궁에 들어가 국왕을 경우궁으로 옮긴 다음 일본에게 왕궁수비를 요청했다.
왕궁에 들어간 김옥균 일파는 민씨 일족의 요인들을 불러들여 왕궁 내에서 살해하여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이조연, 윤태준, 한규직, 유대현과 같은 중신들이 희생되었다.
죽첨공사는 1개 중대의 일본군을 데리고 왕궁에 들어가 친일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는 1천5백 명의 청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청불전쟁으로 이 군대가 이동한다는 소문이 있어 죽첨공사는 그것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홍장은 프랑스와의 강화를 서두르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군대를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죽첨공사는 그래도 일을 전광석화로 진행시키면 성공할 것으로 생각했다.
원세개는 숙청을 모면한 중신 심순택 으로부터 파병요청을 받고 즉시 쿠테타군을 공격해 홍영식, 박영교 등 친일파요인을 살해하고 쿠테타를 분쇄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간신히 도망가 죽첨공사와 함께 천세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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