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3)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3/12 [17:35]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3/12 [17:35]
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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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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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조약이 체결된 1년 후인 1859년 6월 17일 영불함대는 또다시 대고 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미 조인된 천진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대고는 백하의 하구에 있었으며 천진과의 거리는 50km밖에 되지 않았다. 영불함대의 출현소식을 접한 북경 조정은 직례총독 항복을 파견하여 영불 대표를 만나 협상을 진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백하의 하구에는 뗏목과 철조망 등 지난해에는 없었던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포대의 수도 많이 늘어나 있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한 영불 대표들은 청나라 정부가 이런 장애물을 설치한 것은 천진조약을 비준할 의사가 없는 증거라는 비약적인 논리를 폈다.

그리고 영국함대는 백하 하구에 매설되어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타국의 영토 내에서 허가 없이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침략행위여서 6월 25일 오후 2시부터 포격전이 시작되어 24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 군함 4척이 격침되고 2척이 나포되었으며 전투에 참가한 병력 1,200명 중 5백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대참패를 당했다. 또한 영국 제독 호프 제독이 중상을 입자 영국 함대는 항해 불능한 군함과 총포와 탄약을 유기하고 상해로 도망쳤다.

영불 양국은 이듬해인 1860년 영국 측 군함 173척에 병력 1만 8천여 명 프랑스는 군함 33척에 병력 6천 3백 명을 동원하여 7월 말 또다시 백하 어귀에 도착했다. 지난날 아편전쟁의 최고책임자인 퍼머스틴은 “북경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청국황제를 몰아내어 우리의 전권대사를 그곳에 주재시켜야 한다.”고 감정적인 연설을 의회에서 했다.

영불 연합군은 4월에 주산열도를 점령하고 6월 말에 상해에 도착한 후 북상을 계속해 7월 30일 북당 앞바다에 도착해 8월 1일 상륙했다. 이곳을 수비하고 있던 청국 측의 장군은 몽고족의 명장인 승격임침이었는데 용맹성이 뛰어난 장군으로 알려져 있으나 영불연합군의 포격 앞에서는 그의 용맹도 소용이 없었다.

천진을 도저히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관병을 통주까지 후퇴시키자 무주공산이 된 천진은 영불연합군의 군정 하에 놓이고 파크스를 민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이즈음 청나라는 태평천국군과의 싸움도 힘겨운 이때 황제가 있는 북경 부근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기 때문에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파크스가 왔을 때 국서친정문제가 대두되었다. 파크스가 삼궤구고두(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행위)의 예를 거부해 교섭이 결렬되었다.

그러자 함풍제는 당장에 통주로 친정하겠다고 해놓고 9월 22일 동생인 공친왕 혁흔에게 뒷 일을 맡긴 다음 후비와 측근들을 데리고 재빨리 열하로 도망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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