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2/28 [00:01]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2/28 [00:01]
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김용일편집위원장© 주간시흥
1856년 애로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세계열강들이 15년 전에 있었던 아편전쟁의 성과를 한층 더 충족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밀수선 수색사건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제2차 아편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사건의 발단은 중국인 소유의 아편 밀수선인 애로호를 중국 관헌이 부당하게 수색했다는데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아편 밀수는 홍콩에서 영국선적 등록을 하고 영국 국기의 보호아래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1856년 10월 8일 광주 앞바다에 정박중이던 애로호를 청국관헌이 수색하여 해적용의자 이명태를 체포하고 그 밖에 11 명을 연행했다.


그러자 광주 주재 영국영사는 양광총독 섭명침에게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항의각서를 전달했다. “영국 국기를 단 영국 선적의 배를 청국 관헌이 수색하여 선원을 체포한 것은 명백한 조약위반이다. 하물며 청국 군사가 영국 국기를 끌어내린 것은 영국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다. 그러니 체포해 간 선원을 즉시 석방하고 보상과 함께 적절한 사죄를 해야할 것이다.”

이 사건은 영불 연합군의 청국 원정을 야기시킨 계기가 되었지만 사실은 여러 열강들은 이 기회에 다시한 번 청국을 혼내주어 더욱 유리한 조약을 맺으려 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카톨릭 신부 샤프드렌이 중국인 신도를 선동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죄로 사형을 당한 일에 대해 청국에 책임을 묻고 배상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이 일도 샤프드렌이라는 신부가 중국의 법률을 무시하고 들어가면 안되는 곳에 들어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영국 내각은 개전을 결정했고 퍼머스틴 수상은 의회의 찬성을 얻기 위해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여 겨우 찬성을 얻는 비상수단까지 동원했다.

1857년 영불 연합군 5,600백 명이 광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양광 총독 섭명침은 포로가 되어 캘커타로 송치되었다가 그곳에서 2년 후 사망했다. 섭명침은 영불연합군의 포진을 보고 위협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무저항주의를 취했다가 큰 실패를 자초하고 말았다.

광주를 점령한 영불 연합군은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여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주민들은 화염병과 함정작전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불 연합군과 대적했다.

광주에서 아무리 소란을 피워봤자 북경 조정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편전쟁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영불 연합군은 북경을 위협하기 위해 북상을 개시했다. 영불 연합군이 요구하는 조약개정은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미국과 러시아도 똑같이 희망하고 있으므로 그들은 참관인 자격으로 참가했다.

4개국 사절은 영국 군함 10여척, 프랑스 군함 6척 외에 러시아 군함 1척을 앞세워 계속 북상했다. 그러자 청조는 광주로 돌아가서 신임 양광총독 황종환과 얘기하라고 권유했으나 무시하고 계속 북상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시흥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