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양귀비 (4)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2/21 [14:33]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2/21 [14:33]
중국여인열전 - 양귀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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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 주간시흥
양귀비가 죽은 후 10여일 만에 장안이 함락되었다. 이런 소식에도 현종은 오로지 촉 땅으로 피난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연도의 백성들이 현종의 피난행렬을 가로막으며 피난 가는 것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자 현종은 태자에게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이르고 자신은 계속 길을 재촉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태자를 둘러싸고 간청했다.“황제 폐하께서 구태여 피난을 가신다면 저희 백성들은 황태자를 모시고라도 반란군을 무찌르고 수도 장안을 탈환할까 합니다.”태자는 황손 숙을 현정에게 보내 백성들의 뜻을 아뢰도록 하니 현종은 “모든 것이 천명이다. 태자는 백성들의 뜻에 따라 분발하라. 서북의 여러 호족들은 짐이 오랫동안 애무하던 바라 분명 태자의 힘이 도어 줄 것이다.”라고 그의 뜻을 선포하고 양위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태자는 이를 사양했다. 태자가 평랑에 나가자 삭방 유후 두홍점이 나와 태자를 맞이하며 현종의 칙명에 따라 즉위할 것을 간청했다.

태자는 쉽게 승인하지 않았으나 여러 차례 간청을 드리자 마침내 허락하여 현종 황제에게 상황 천제라는 존호를 만들어 올리고 태자 이형이 즉위하여 당 숙종이 되었다.
 

이때가 756년의 일이다. 안록산은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낙양과 장안을 한때 그의 손아귀에 넣었으나 757년 그의 맏아들 안경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안록산은 반란을 일으킨 뒤 눈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이 무렵에 이르러서는 완전 실명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적자인 안경서를 폐하고 애첩의 아들인 안경은을 후계자로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안경서가 선수를 쳐 그의 아버지인 안록산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숙종이 영무에서 진용을 정비하여 장안을 탈환하기 위해 나가자 회흘족의 수장은 그의 아들 섭호에게 정병 4천을 거느리고 합류하게 했고 병마원수 광평왕 이숙과 부원수 곽자의가 지방군과 회흘 서역의 군사 15만을 거느리고 장안 탈환작전을 벌였다.

장안을 장악하고 있던 안록산군은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패색이 짙어 도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당나라의 대군이 당당하게 장안에 입성하여 시민들을 위무한 뒤 군사를 거느리고 가 낙양을 탈환했다. 그러자 안경서는 낙양에서 업으로 패주했다.

 
758년 곽자의 등이 아홉 절도사에게 명해 안경서를 토벌토록 하자 안록산의 부장이었던 사사명이 안경서를 지원하는 바람에 아홉 절도사의 군대는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자 사사명은 안경서를 죽이고 업은 그의 아들 사조의에게 지키라하고 자신은 범양으로 돌아가 대연 황제라 칭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째 되던 해에 사사명은 그의 아들 사조의에게 죽임을 당하고 761년 사조의가 제위에 올랐으나 패전을 거듭한 끝에 763년 자살함으로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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