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양귀비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2/07 [18:46]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2/07 [18:46]
중국여인열전 - 양귀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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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주간시흥
735년부터 당나라 조정은 간신들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정치는 부패일로로 치닫고 있었고 변경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절도사들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 유사시에 당 왕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절도사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인 안록산은 742년 새로 설치된 평로절도사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범양절도사를 겸하게 되고 2년 후에는 하동절도사까지 겸하게 되어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안록산은 보기 드믄 뚱뚱한 몸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익살스럽고 털털하며 모나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성격을 바탕으로 안록산은 현종과 양귀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고 싶다고 자청하여 입궐하면 먼저 양귀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다음에 현종을 배알할 정도였다.
 
안록산은 수시로 궁중에 출입하면서 때로는 한 밤을 궁중에서 지내는 일이 있어 양귀비와의 추문이 널리 세상에 퍼졌지만 현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안록산에게 하동절도사를 겸하게 했다.

안록산이 거란을 격파하여 큰 공을 세우자 양국충과 결탁해 이 시대의 최고 권력자인 이임보 배척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임보가 죽고 나서 안록산과 양국충이 서로 배척운동을 벌이기 시작하며 대립하기 시작하게 되자 황제 가까이에 있는 양국충이 현종에게 안록산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거듭 간하자 이 말이 안록산의 귀에 들어가자 자신이 차츰 불리해지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755년 11월 군대를 움직였다. 밀조를 받들어 양국충을 친다는 것이 거병의 이유였다.

현종은 장안에 호화주택을 지어 안록산에게 주는 등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록산이 모반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현종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도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잇달아 들어오는 안록산의 반란보고를 들은 현종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수도 장안을 수비할 병력을 알아보니 전투를 할 만한 군사는 전무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현종은 병 치료차 장안에 와있던 하서. 농우(감숙, 청해 일대)의 절도사 가서한에게 급히 긁어모은 잡병 8만을 거느려 동관(섬서성에 있으며 낙양에서 장안으로 들어오는 요충지)을 수비하도록 명했다.

그 무렵의 세상은 수십 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려왔기 때문에 아무 방비가 없어 안록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해 낙양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정월에는 스스로 옹무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연으로 정했다.

그러나 낙양을 함락시켰다고는 하지만 안록산의 반란군은 인심을 얻지 못했다. 처음에는 각 지방이 아무 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반란군이 마음대로 진격 할 수 있었지만 얼마 후부터는 이곳저곳에서 백성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반란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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