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여태후 (6)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10/19 [11:24]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10/19 [11:24]
중국여인열전 - 여태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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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용일


 동생인 조왕 여의를 맞이한 다음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조왕과 침식을 같이 했다.
연왕 노관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조는 이미 병이 들어 있었다. 고조의 병상에는 고조가 사랑하는 척부인파의 환관이 척부인의 지시를 받아 여후가 낳은 태자 영을 폐하고 척부인이 낳은 여의를 빨리 태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은근히 충동질하고 있었다.

여후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고 있는 번쾌는 척부인파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로 연왕의 반란군을 토벌하러 간 지금이야말로 번쾌를 제거하기에 좋은 기회이기에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시작했다.

“번쾌는 여씨의 일당이어서 만약 하루아침에 황상께서 유고하시는 날에는 번쾌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 척부인과 조왕 여의의 무리들을 모두 죽여 없앨 것입니다.”라고 참소하자 고조가 매우 화를 내며 진평과 주발을 불러 “주발은 번쾌를 대신하여 장수가 되고 진평은 번쾌를 잡아 당장에 군중에서 죽여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은 받은 진평과 주발은 상의하여 번쾌를 죽이지 않고 일단은 함거에 실은 다음 연행하여 죽이고 살리는 것을 고조에게 맡기려고 장안으로 압송하는 도중 고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번쾌는 석방되고 작위와 명예는 회복되었으며 정치적 실권은 여후에게로 넘어갔다.

고조가 죽자 태자 영이 황제의 위에 올라 혜제가 되었으나 나이가 어리고 유약하여 실권은 태후로 올라 선 여태후가 장악했다. 그러자 가장 난감한 처지에 빠진 것은 척부인이었다. 여후는 많은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척부인에게는 오직 고조 한사람뿐이어서 고조가 죽고 난 후 그녀는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되었다.

태자의 폐립문제나 번쾌의 주살 음모 등이 모두 척부인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것을 안 여태후는 척부인을 증오하고 있었고 또한 남편인 유방이 척부인 만 사랑하고 자기를 멀리한 것도 분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 여태후는 척부인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것도 단번에 쳐 죽이는 것은 성에 차질 않아 역사상 가장 잔인하게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태후는 우선 척부인을 영항에 가뒀다. 영항은 원래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여러 개의 방이 거리처럼 쭉 배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후궁이 죄를 범했을 때 치죄하던 곳이었다. 척부인의 머리를 깎고 재갈을 물렸으며 빨간 옷이 입혀지고 그곳에서 방아를 찧는 벌이 내려졌다.
 
 척부인을 가둔 여태후는 척부인의 아들인 조나라 왕 여의를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혜제는 동생 여의가 궁중에 오면 여태후에 의해 살해될 것을 알고 패상까지 나가 생인 조왕 여의를 맞이한 다음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조왕과 침식을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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