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여태후 (5)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10/11 [20:0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10/11 [20:07]
중국여인열전 - 여태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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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용일


 고조는 비혁이 영포가 모반한 증거가 있다고 올린 글을 읽고 영포에게 사자를 보내 진상을 알아오라고 했다.

회남왕 영포는 비혁이 고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차에 한나라 사자가 와서 영포를 심문하니 화가 나 비혁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군대를 동원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고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영포를 토벌하러 나섰다.

이에 대해 영포는 동쪽으로 진군해 형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그 군대를 인솔하여 서쪽으로가 한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영포와 마주친 고조가 공격 명령을 내려 싸우니 영포는 크게 패해 백여 명의 군사와 함께 강남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고조는 유시(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는 다른 장수에게 명해 영포를 추격하게 하니 영포는 번양으로 달아났고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잡혀 죽고 말았다. 이로부터 7개월 후에는 고조도 죽고 말았다.

사실 고조는 영포의 토벌 작전에 나서기 전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서 태자인 영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영포를 토벌하게 할 예정이었지만 여후가 반대하고 나섰다.

여후가 반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영포가 천하의 맹장으로 용병에 능한 사람이니 그를 무찌를 사람은 폐하밖에 없다고 눈물로 호소하자 고조는 할 수 없이 친히 영포를 토벌하러 갈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실은 고조가 조강지처인 여후를 멀리하고 척부인을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척부인은 자기가 낳은 아들 여의를 사랑한 나머지 여의를 태자로 책봉해 달라고 울면서 조르고 있었으며 고조는 현재의 태자인 영이 너무 유약하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때 태자 영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영포를 토벌하러 보낸다는 것이었다. 만약 태자가 이 토벌작전에 공을 세운다면 몰라도 실패하거나 지지부진한 성과를 가져온다면 태자를 폐하는 좋은 구실이 될 수밖에 없기에 여후는 태자가 영포를 토벌하러가는 것을 맹렬히 반대했던 것이다.
영포를 토벌하고 돌아오던 중 고향에 들려 큰 잔치를 열어 고향사람들을 대접한 다음 장안으로 돌아 왔을 때 연나라의 노관이 모반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족인 유씨가 아닌 사람 중에 왕위에 남아 있는 사람은 노관뿐이었다.

노관은 황족은 아니었지만 고조의 죽마고우여서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낸 사이로 그의 반란은 의외일 정도였다. 이에 대해 고조는 번쾌를 시켜 연나라를 토벌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은 그의 궁인과 가족들 그리고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장성 안에 있으면서 상황을 보고 있다가 황제가 병이 나으면 자신이 직접 들어가 사죄하려 했으나 그 해 4월 고조가 죽자 그의 한가닥 희망은 무산되고 말았다.
 
노관은 할 수 없이 그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흉노 땅에 들어가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다가 그곳에서 1년 후에 죽고 말았다. 새로운 연왕에는 고조의 막내아들 유건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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