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여태후 (4)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10/04 [13:05]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10/04 [13:05]
중국여인열전 - 여태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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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용일

 
 
고조가 환궁하는 도중 조나라에 들렸는데 조왕은 고조의 장녀인 노원공주의 남편이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고조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욕설을 퍼부으며 조왕을 꾸짖었다. 그러자 자신들이 섬기는 조왕이 고조에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본 조왕의 신하들은 고조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다행이 이 일은 사전에 발각되어 황제 시해사건은 일단락이 되고 신하들이 모의했고 조왕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판명되어 목숨은 건졌지만 왕위를 폐하고 선평후로 격하 당하고 말았다.

그런 다음 고조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의 소생인 여의를 겨우 9세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조왕에 봉했다.
이즈음 한나라의 정책은 황족에 한하여 왕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한신이 처형된 고조 11년(기원전 196)의 시점에서 황족이 아닌 사람이 왕으로 있은 것은 회남왕 영포, 양왕 팽월, 연왕 노관 세 사람뿐이었다.

한신이 억울하게 죽은 해 양왕 팽월이 모반을 일으켰다. 진희가 배반했을 때 고조가 친정에 나서자 팽월은 부하 장수만을 보내고 자신은 병을 핑계 삼아 출정하지 않았고 문책의 사신이 왔을 때도 사죄만 했다.

그러자 그의 부장 호첩이 차라리 모반을 일으키자고 권유했지만 팽월은 여전히 병을 핑계 삼아 움직이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양왕 팽월이 모반을 일으켰다는 밀고가 들어와 팽월은 어이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일단 죽음은 면하고 촉으로 유배되었으나 마침내는 처형되었다. 그리고 고조는 자신의 다섯째 아들 유회를 양왕으로 삼았다.

고조가 항우와의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었던 것은 한신, 팽월, 영포 세 사람 때문이었다. 이들 가운데 한신과 팽월이 죽었으니 다음 차례는 영포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포의 생각은 모반을 하지 않더라도 모반의 죄를 뒤집어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포는 몰래 군대의 부서를 정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임무를 정해두고 주변을 살피며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포가 사랑하는 여인이 비혁이 사람됨을 칭찬했다. 비혁은 영포의 시중으로 이 여인과 술을 마시고 논적도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이 말에 경포가 화를 내며 어디서 그를 알게 되었느냐고 하며 둘 사이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비혁이 두려운 마음이 일어 병이 들었다고 핑계를 대자 영포는 더욱 그를 의심하여 체포하려 했다.
 
그러자 비혁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영포의 모반을 밀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장안으로 말을 달렸다. 이런 사실을 안 경포는 급히 사람을 시켜 비혁을 잡아오게 했지만 실패하여 비혁이 장안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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