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여희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07/04 [15:0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07/04 [15:07]
중국여인열전 - 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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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용일

춘추시대 제후국 중의 하나인 진(晉) 나라 헌공은 개성이 강한 인물로 즉위 5년 만에 융적을 멸망시키고 이어 군비를 증강하여 곽, 경, 위, 우, 괵 등 여러 나라를 쳐서 합병했다. 공 12년(BC 665)에 그가 사랑하는 여인 여희에게 공자 혜제가 태어났다. 여희는 헌공이 융적을 토벌할 때 얻은 여자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매우 총명했다.

당시 진 나라에는 이미 태자가 정해있었는데 헌공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중에 현명하기로 이름난 사람이 셋이었다. 그 한사람이 태자로 정해진 신생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중이와 이오였다.

융적의 미녀 여희가 들어오자 헌공은 여희를 총애했고 총애하는 여희가 혜제를 낳자 헌공의 마음이 달라져 세 공자를 멀리하기 시작하자 이를 눈치 챈 여희는 아들의 장래 문제를 보장 받으려 헌공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여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헌공은 마침내 태자 신생을 곡옥에 중이를 포에 이오를 굴로 부임시켰다.
곡옥에 부임한 신생은 죽은 어머니의 기일이 돌아오자 제사를 지내고 그 음식을 헌공에게 보냈는데 여희는 이 음식에 극비리에 독약을 넣어놓고 헌공이 그 음식을 먹으려하자 먼 곳에서 온 음식이니 시험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술을 땅에 부으니 땅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고기를 개에게 던져주니 개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이를 본 헌공을 대로하여 그 자리에 없는 신생 대신 신생의 스승인 두원관을 죽여 버렸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신생은 급히 신성으로 도망쳤고 측근들이 망명할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하고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희는 태자 신생이 죽은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혜제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중이와 이오 등 유능한 공자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희는 중이와 이오를 그대로 둘 수 가 없기에 헌공에게 신생의 독약사건을 중이와 이오도 알고 있었다고 고해 바쳤다.

여희의 음모를 눈치 챈 중이와 이오가 각자 자기의 거성으로 몰래 도망가 버리자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간 사실을 안 헌공은 이들이 신생과 짜고 자기를 죽이려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어 중이와 이오의 거성에 군대를 파견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긴급한 위기에 처해 세 공자는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해 신생은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자결을 택했고 이오는 거성인 굴로 돌아가 방비를 튼튼히 한 다음 파견군에 철저히 항전했으며 중이는 어머니의 고국인 적 땅으로 도망쳐버렸다.

헌공이 중이가 적 땅으로 망명한지 5년 만에 죽고 혜제가 즉위했지만 그해(BC 651년) 10월 비정과 이극이 반란을 일으켜 혜제와 여희를 죽이고 여희의 동생이 낳은 도자를 옹립했으나 11월에 이극이 다시 도자를 죽이고 적 땅에 가있는 중이에게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중이는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대신들은 이오를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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