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달기(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05/09 [16:31]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05/09 [16:31]
중국여인열전 - 달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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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 주간시흥
주(周)의 시조는 요순시대 농업담당이었던 후직으로 후직은 어렸을 때부터 씨뿌리기를 좋아했고 그가 씨를 뿌려 심은 곡식이나 나무가 아주 잘 자라는 등 크면서 농사에 천부적인 자질을 보이자 당시의 순임금은 그를 후직(지금의 농수산부장관)으로 임명해 백성들에게 합리적인 농사법을 가르치게 하여 그때부터 후직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직의 아들이 부즐이고 부즐의 아들이 공유이며 공유의 9대손인 고공 단보에 이르러 기산으로 옮겨 국명을 주(周)라하고 비로소 제후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고공 단보가 태왕이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태백, 우중, 계력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막내인 계력이 현명한 아내를 만나 창을 낳았다.
창이 자라면서 범인과 다른 면을 보이자 이런 모습을 눈여겨 본 태왕은 장차 창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려면 막내아들인 계력에게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어야 했지만 당시의 주나라는 철저한 장자 상속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아버지의 의중을 헤아린 태백과 우중은 서로 상의하여 멀리 남쪽에 있는 형만의 땅으로 가 스스로 가계를 이을 자격을 포기하고 말아 이 두 형의 뜻에 힘입어 계력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그가 죽자 드디어 창이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은 왕조의 주왕이 제위에 오른 것은 서방의 주(周)나라가 제후국으로 명성을 높이고 있었던 창(후일 문왕)의 시대였다.
창은 그의 할아버지 태왕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어진 정치를 해 나날이 국력이 신장되어 갔으므로 은 왕조로서도 이 강력한 제후국의 영주인 창에게 서백(서쪽 제후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라는 지위를 수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서백이 바로 동료대신이었던 구후와 악후의 참혹한 죽음을 듣고 탄식했다가 유리의 옥에 갇혔던 창이었다. 창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周)나라의 영주가 되자 그는 주왕의 포악한 정치와는 대조적으로 노인을 공경하고 약한 자를 위하며 인덕을 쌓아가는 한편 주나라의 판도를 넓혀 섬서성 서안시 부근에 있는 풍읍까지 차지했다.

창은 풍읍을 토벌한 후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 더욱 세력을 확장해갔다. 풍읍으로 도읍을 옮긴 서백은 더욱 인덕을 쌓는가하면 널리 인재를 구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유리의 옥에 갇혔을 때 자신을 구해준 괴요와 신의생 등이 그의 곁으로 돌아왔고 주나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태공망 여상도 이 무렵 위수에서 맞아들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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