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경찰국가 미국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03/08 [14:44]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03/08 [14:44]
세계의 경찰국가 미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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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 주간시흥
1949년 소련은 탱크를 앞세워 공산정권수립을 거부한 체코를 침공하고 핵폭탄 개발에도 성공하여 핵보유국이 되었고 중국 내전에서도 공산당이 승리하여 중국 대륙이 공산 통일되면서 미국의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공포가 확산되어 미국 내의 여론도 강경 노선으로 돌아서 트루먼 독트린 지지로 돌아섰으며 미국 의회에서도 반공보수 세력이 득세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그 동안의 냉전이 열전으로 터진 대리전쟁으로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와 공산통일 그리고 스탈린의 팽창주의 정책, 미군의 남한 철수에 고무된 북한의 김일성이 스탈린의 지원 약속을 받고 남한을 기습 공격하여 터진 전쟁으로 이 전쟁은 무려 3년이나 끌며 한민족에게 지금까지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전쟁 초기의 미국인들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을 지지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여론을 의식하여 소련이나 중국과의 전쟁이 확대되지 않도록 제한전을 원했다.

그러다보니 전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한편에서는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려는 협상이 계속되는 기묘한 전쟁이 되고 말았다.
1953년 대통령에 취임한 아이젠하워는 전쟁 영웅이었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첫 임무는 한국전쟁을 빠른 시일 안에 끝내는 것이어서 그해 3월 소련을 30년간이나 지배한 공포의 독재자 스탈린이 사망하고 소련과 중국이 미국의 핵무기를 의식해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조인하여 한반도에서의 총성은 일단 멎었다.

이념의 대리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가운데 일단락 지어졌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베트남에서 또 전쟁이 터졌다. 일본군이 물러난 뒤 동남아의 여러 나라에 영국과 프랑스 등 전 지배세력이 들어오자 갈등이 심해졌고 호치민이 이끄는 세력은 프랑스의 재 지배를 거부하고 무력 투쟁을 벌여 프랑스군과 공산군 사이의 전투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1954년 3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혹하게 패배한 프랑스는 다급히 미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프랑스 지원을 합리화 했는데 그의 속뜻은 미국은 군사력으로 소련의 아시아 진출을 방해하고 아시아에서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을 만들어 공산세력을 막자는 것이었다.

1954년 5월 중요한 전략거점인 디엔비엔푸가 공산군에게 점령되었다. 이제 미국은 결단을 내려야했지만 한국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전쟁을 시작하기가 어려워 협상을 통해 17˚ 선에서 남북을 분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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