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3)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02/14 [17:56]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02/14 [17:56]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3)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미국이 전쟁에 낄 의사가 없음을 눈치 챈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침략을 노골화하여 미국령인 필리핀까지 점령하고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진출하여 아시아에서 미국을 완전히 몰아낼 뜻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일본에 대해 철과 석유 등 군비산업에 필요한 물자의 수출을 전면 중단해 미국과 일본 간의 무력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41년 초 일본주재 미국대사인 조셉 그루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계획을 미국 정부에 알렸지만 미국의 관심은 온통 유럽에만 쏠려 있어 일본의 기습에 대해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12월 7일 대대적인 진주만 기습을 당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전쟁에 반대하던 국민들까지 단결하게 만들어 루스벨트는 전 미국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뉴딜정책이 7년간이나 이루지 못한 것을 단숨에 해결해 주었다. 국민소득이 군수산업으로 크게 늘고 실업자가 사라지는 등 지겹고 기나긴 대공황의 터널을 순식간에 빠져 나올 수 있었다.

1942년의 전쟁 상황은 3국 동맹에 유리하게 진행되어 히틀러의 군대는 소련으로 진격했고 일본은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당한 독일군 30만 명은 소련의 혹독한 추위에 겨우내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다가 무려 16만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7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한편 아프리카에서는 몽고메리 장군이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을 격파하여 이를 계기로 유럽 전장에서의 전세는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어 미국은 아이젠하워 장군을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총공세를 위한 전열을 가다듬었다.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1944년 6월 6일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연합군은 5,000명의 전사자를 내기는 했지만 15만 명이 유럽에 상륙할 수 있었다. 지중해에서도 연합군이 상륙하여 6월 5일 로마를 점령했고 8월 25일에는 드디어 파리를 해방시키며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군도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1944년 10일 필리핀을 탈환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일본 공격을 강화하자 일본은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까지 동원하여 이들을 막으려했지만 이미 기울어가는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1945년 2월 19일 미군은 4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7,000명의 전사자와 19,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이오지마섬을 함락시켰다. 이 섬은 도쿄에서 불과 1,20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전략적 거점으로 미국은 무수한 폭격기를 보내 일본 전역에 폭탄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시흥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