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02/01 [12:19]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02/01 [12:19]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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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미국이 고립주의를 지키려는 의지는 1939년 ‘캐시 앤 캐리’ 제도로 강조되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물자가 급한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국가가 미국에서 물건을 사갈 때는 반드시 현금으로 물건 값을 치른 배만 떠날 수 있도록 규정한 제도로 루스벨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외교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1937년 일본 전투기가 미국 군함을 양자강에서 침몰시켰을 때에도 루스벨트는 250만 달러의 보상금으로 사건을 매듭지을 정도로 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2기 임기 시작 후 경제는 지독한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고 2기 뉴딜정책도 별 효과가 없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럼에도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에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참전을 선언하는 1941년 12월까지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유럽의 전쟁이 치열하던 1940년 말 루스벨트는 사상 처음으로 3선에 도전했다. 그의 3선 도전에 대해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내에서도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전쟁 위기에서 지도자를 바꾸기보다는 안정을 원했던 유권자들은 다시 루스벨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39년 전쟁을 시작한 히틀러는 승승장구하여 1940년에 덴마크, 노르웨이를 점령한 뒤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단 18일 만에 점령하고 6월 22일에는 파리에 입성하여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 소련을 제외하고 전 유럽을 히틀러가 장악해 오직 영국만이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영국이 함락되면 히틀러의 위협이 미국에 뻗힐 거라는 판단 아래 미국은 대대적으로 영국에 군수물자를 대주며 무기를 팔자 히틀러는 당연히 미국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1941년 5월 독일 잠수함이 미국 배를 침몰시키자 루스벨트는 즉각 국가위기상황을 선포하기는 했지만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아프리카에서는 사막의 여우라는 롬멜이 영국군을 격파하고 리비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진격했고 6월 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고 10월 27일 또다시 독일 잠수함이 미군함 커니호를 격침시켜 수병이 100명 이상 사망했어도 루스벨트는 끝내 히틀러에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은 일요일 아침잠에 빠진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 태평양함대 전함 19척이 침몰하고 2,400명이 사망했으며 149대의 전투기가 파괴되었고 오클라호마, 네바다, 애리조나호 등 미국 해군의 기둥이던 전투함들이 반격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태평양에 가라앉고 말았다.

비슷한 시각에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던 필리핀 마닐라의 미군 항공부대도 일본전투기의 기습공격으로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이 일로 다음날 미국 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인준했고 12월 11일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지는 제2차 세계대전의 당사국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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