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01/24 [20:02]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01/24 [20:02]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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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 주간시흥
1933년 루스벨트가 미국 제32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같은 해 독일에서는 나치당을 이끄는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다. 이 두 지도자는 모두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국내경제를 재건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32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전쟁보상금을 물게 되자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알자스-로렌 등의 영토까지 빼앗긴데다 패전한 국민들의 열등의식까지 겹쳐 국민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이런 국민들의 정신적 공황상태를 교묘히 이용하여 마침내 아돌프 히틀러는 독재 권력을 장악했다.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경제를 회복시킨 히틀러는 점점 세계 정복이라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1938년 히틀러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했으며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여 독일 민족의 제3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독재자로 등장한 무솔리니와 손을 잡았고 동양에서 중국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과도 동맹을 맺은 다음 1936년 벨기에와 프랑스의 접경지대인 라인란트를 점령하고 무솔리니와 함께 사회주의 정권을 뒤엎은 프랑코를 도와 스페인에 독재정권이 수립하도록 도와주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까지 합병한 히틀러는 독일인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체코를 침공했다. 하지만 다시 세계대전이 터질 것을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는 뭔헨조약으로 이를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평화를 바라는 희망과는 정반대로 히틀러의 야망은 그치지를 않고 1939년 9월 1일 기습적인 폴란드 침공과 함께 6년에 걸쳐 5,3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긴 인류 최대의 비극인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렸다.

이때의 미국은 공황 극복이라는 경제문제로 국제문제에 끼어들 처지가 아니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철저한 고립주의 정책으로 돌아 엄격한 이민법과 높은 관세로 외국에 대해 나라의 문턱을 높였고 새로 탄생한 공산국가인 소련을 정식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 고립주의 정책을 현실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이미 막대한 자본이 해외에 투자되었고 미국시장이 국제시장과 대단히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국제정세의 변화가 미국경제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루스벨트는 해외, 특히 유럽문제에 대해 불간섭주의 또는 고립주의를 표방하여 전운이 깃든 유럽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유럽문제에 절대 간섭하지 말라는 국내의 여론도 큰 이유였다.

경제공황으로 어려워진 미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정부를 원망하기 시작하여 1934년 존슨법을 제정하여 미국에 진 빚을 갚지 못하는 나라에는 돈을 빌려주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았는가 하면 1936년에는 미국이 외국의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아예 중립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전쟁을 하는 나라에 무기나 군수품을 판매하거나 수송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었지만 막상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사실상 지켜지지 않는 죽은 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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