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4)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7/19 [19:13]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7/19 [19:13]
남북전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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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캔자스가 둘로 쪼개지는 사태가 벌어지자 북부의 찰스 섬너 의원이 남부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남부 출신 프레스턴 브룩스 의원이 섬너를 지팡이로 마구 두들겨 패 평생을 불구로 살게 만들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처럼 떠들썩했던 캔자스에는 정작 노예가 300명도 안 돼 노예제란 표면에 나타난 구실일 뿐 그동안 쌓였던 지역감정과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문화의 차이가 노예제로 포장되어 나타났을 뿐이었다.

캔자스 문제는 몇 년을 더 끌다가 1858년 재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노예제 금지를 결정하자 남부는 다시 한 번 깊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캔자스가 시끄럽고 유혈충돌이 계속되고 남북 간 세력싸움이 치열했어도 정작 대부분의 북부인들은 핵심쟁점인 노예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853년 출판된 헤리엇 비처 스토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이 발표되자 비참한 흑인 노예들의 삶을 읽고 북부인들은 뜨거운 눈물을 쏟았으며 흑인을 개나 돼지만도 못한 노예로 부리는 남부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북부인들의 여론에 불을 질렀다.

또한 스토부인은 이 책의 인세를 노예제 철폐운동에 기탁하여 노예해방운동에 큰 기여를 했지만 반대로 남부입장에서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책이었다. 

존 브라운은 코네티켓주 토링턴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엄격한 청교도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열렬한 노예해방론자가 되었고 그의 집은 비밀결사 조직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존 브라운은 현실적인 노예해방은 오직 폭력으로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유혈사태로 난장판이 된 캔자스로 이주하여 자신의 아들들과 도망친 노예들을 모아 폭력비밀결사대를 결성했다.

그들은 열렬한 노예주의자 백인 다섯 명을 포타와토에서 무참히 살해하고 정부군의 무기고를 점령한 다음 흑인들의 봉기를 선동했다.
하지만 흑인들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고 정부토벌군과 맞서게 되어 거세게 저항했지만 결국 체포되었다.

남부인들에게는 공포의 살인마요 폭동반란의 괴수였지만 북부인들에게는 정의의 용사요 신의 대리인이었던 그는 끝까지 범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전 미국의 찬반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사형을 언도받고 1859년 12월 2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남북 간의 감정 대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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