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산책

미국의 탄생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5/17 [11:38]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5/1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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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탄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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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주간시흥
미국의 탄생 (2)
편집위원장 김용일

영국은 존 부르고뉴 장군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워싱턴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9월 19일 새러토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훗날 항공모함에 세러토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미국 돕기를 망설이고 있던 유럽국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어 프랑스의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에스파니아와 네덜란드도 미국을 돕기로 결정해 미국의 독립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전쟁을 결판이 나지 않고 지루한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는데 워싱턴은 영국군보다 오히려 자신의 군대인 미국군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자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는 군인이 늘어가고 밀린 봉급을 달라고 투쟁이 벌어지는가하면 전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지도자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최악의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워싱턴에게 영국군은 서서히 사기가 저하되어 갔고 지휘부의 갈등으로 군대의 기강이 무너져 내리자 영국내의 여론도 전쟁에 반대하는 분위가가 형성되어 가는 중에 미국은 또다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했다.

1781년 10월 9일 영국 해군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미국군에게 최후의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뉴욕항을 떠나는 순간 요크타운에서 영국군 사령관 콘윌리스 장군이 미국군의 포위를 뚫지 못하고 워싱턴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 항복은 그렇지 않아도 전쟁을 반대하는 영국내의 여론을 더욱 악화시켜 미국군의 사기가 올라갔고 또한 전쟁이 시작된 이래 국가의 빚이 2배로 늘어난 책임을 떠맡은 의회가 전쟁비용 지출을 거부함으로써 영국정부는 영국군의 귀환을 명해 7년여에 걸친 지루한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독립을 했고 자유도 얻었지만 아직 나라를 갖지는 못했다. 그들은 세계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의 손으로 국가를 만들어야 했고 국가를 만들기 위해 헌법을 만들어야 했다.

드디어 1787년 미합중국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의회가 소집되었고 1년 가까이 격렬한 논쟁을 거친 끝에 1788년 6월 21일 13개 주 중 마지막으로 뉴햄프셔주가 한법을 승인함으로써 미국의 헌법은 효력을 발휘하여 13개주는 강력한 중앙정부에 의해 통합되었고 헌법에 따라 초대 선거인단은 선거를 통해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을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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