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산책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5/03 [11:59]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5/03 [11:59]
역사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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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의 반발 (2)



▲ 김용일 편집위원장     ©주간시흥
영국이 유화정책을 취하긴 했지만 미처 타운센트법 폐지 소식을 듣지 못한 보스턴의 일부 시민들은 보스턴 세관을 습격하여 영국군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이들이 손으로 뭉친 눈을 던지기 시작하자 흥분한 영국군이 발포하여 5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날의 사건을 ‘보스턴 학살’ 이라 하여 미국혁명의 최초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미국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양보로 식민지인들의 흥분은 점차 가라앉았고 1773년까지 평온이 유지되었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파산위기에 몰리면서 터지고 말았다.

영국의 많은 정치 거물들이 이 회사의 대주주였으므로 동인도회사의 파산여부는 이들에게 심각한 문제여서 1773년 영국의회는 ‘차조례’를 제정하여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 차를 팔수 있도록 한 후 런던의 창고에 쌓여 있던 1,700만 파운드의 차를 싼 값에 팔아 동인도회사의 파산을 막으려고 했다.

1773년 12월 16일 밤에 헨콕, 새무얼 애덤스 등 ‘자유의 아들들’ 단원들은 인디언으로 분장하고 보스턴 항으로가 7만5천 달러어치나 되는 동인도회사의 차를 실은 배에서 바다로 모두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영국의회가 격분하여 1774년 3월 식민지가 손해보상을 하지 않으면 항구를 해군으로 봉쇄하는 법과 영국법 집행 중 살인을 하게 되면 영국법으로 재판을 받도록 보호하는 법 그리고 미국인의 거주지를 오하이오 계곡으로 제한하여 캐나다에 유리한 법을 계속 제정했다.

이에 반발한 식민지인들은 1774년 9월 5일 조지아주를 제외한 미국의 모든 식민지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이 회의는 훗날 ‘대륙회의’라는 명칭으로 계속되는데 이 회의 자체가 영국의 조지 3세를 격분시켜 군대를 출동시켰다.

드디어 영국군 사령관 토마스 게이지가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1775년 4월 19일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렉싱턴에 도착한 영국군대는 처음으로 마주친 70명의 민병대와의 총격전에서 8명 사망, 10여명의 부상자를 민병대 측에 내며 물리쳤지만 다시 민병대의 5배나 되는 농민군과 마주쳐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이 전투에서 농민군 93명이 죽고 영국군은 800명 가운데 273명이나 목숨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이 전투로 인해 영국과 미국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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